학기나 학년이 끝날때 마다 학생들은 묻는다. "샘, 이제 교과서 버려도 되죠?"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끔 난감하다. "그래, 필요없는 사람은 버리든지 개인이 알아서 선택해" 이랬다가도 "너, 책 내용 다 알아? 다음에 다시 볼 일 있지 않을까?" 하면 십중팔구 학생들은 다 버린다. 연말에 폐지업자의 트럭이 오면 자원 재순환의 활용템으로 변신한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이 말도 상투적인 표현(cliche)같지만 누구나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볼 일 없는 것이 교과서이다. 마치 패션처럼 한 때 유행했다가 소비되고 소멸된다. 학교 교육 과정도 7차, 2006개정, 2008개정, 2009개정 교육과정, 2015개정 교육과정으로 빠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당연히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도 바뀐다. 교과서의 내용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패션에서 시간이 지나도 좀 오래 입을 수 있는 기본템이 있듯이, 교과서를 가리키다 보면 이건 좀 일반인들도 다시 봤으면 하는 클래식(classic)한 내용이 있다.
오리떼와 백조
그 중 하나가 안데르센 동화인 백조오리이다. 이미 많이 여러 가지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일종의 '경계선 자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오리들 세상에 오리와는 다르게 생긴,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이른바 '미운오리새끼'이다. 오리들 세상에서는 그들과 모양이 달라도 오리들 세상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목도 움추리고 울음소리도 그들과 같이 내야 하고, 안 되면 흉내라도 내야 하고 연기도 해야 한다. 그래도 오리들이 이 '미운오리새끼'를 그들 오리군의 범주에 넣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 생태계는 냉정하다. 다행히 등치가 크고 민첩한 '미운오리새끼'라면 먹이를 이 오리들에게 상납해야 할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 때 '미운오리새끼'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철저히 오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의 세상에 동화되든가, 아니면 나 홀로 외로이 독야청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취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전자의 선택이 자연스럽다. 2008년 개정 교육과정중 중학교 교과서로 기억한다. 이 오리들 세상에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백조들이 날아든 것이다. 등치도 생김새도 비슷한 이 백조떼들을 보며 친근감을 느낀 이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본문내용의 주제는 한 마디로 'Be yourself!' 이다.
어려운 선택이다.
오리들 세상에서 백조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유지한다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난 고통이다.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오리들과 동화되기 위해 오랫동안 목을 움추리고 울음소리도 바꿔 왔던 이 '미운오리새끼'는 백조들 세상에서는 '미운백조새끼'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무슨 백조가 그렇게 움츠리고 울음소리는 또 그게 뭐냐?" 또는 "너 백조 맞아?"하면서 '미운오리새끼'시절 받았던 질문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질문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리들 세상에서 나 홀로 "난 백조야!!" 하면서 백조의 자세와 목소리를 끝까지 지켜낸 경우에만 백조들 세상이 오면 드디어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나의 고향으로 동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럴려면 최소한 내가 오리인지 백조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
혹자는 인생은 전 생애 과정을 받쳐 내가 누구인지(Who I am)를 알아내는 과정이라 했다.
내가 오리인지, 백조인지를 아는 데 전 생애가 걸린다면 매 순간 순간, 나의 선택에서 오리로서 일관성을 가질지, 백조로서 일관성을 가질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보통의 평범한 우리는 백조오리라서 어느 날은 오리였다가, 또 어느 날은 백조였다가 이것은 또 어느 날은 오리도 아니다가, 또 어느 날은 백조도 아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흐르는 물처럼 급변하는 세상에서 적응하고 그야말로 살아내기 급급한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인생의 끝부분에서야 비로소 '아, 난 오리였구나!', 아님 '아, 난 백조였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