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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말 Sep 02. 2019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 / 자유로부터의 도피 / 휴머니스트> 를 읽고


내 종교는 기독교이다. 아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기독교에 속해있는 개신교 이며, 그중에도 기독교대한감리회 라는 교단의 교회에 다니고 있다. 


나는 모태신앙은 아니다. 그렇지만 5살에 천주교부설유치원, 6살부터는 교회부설유치원을 다녀서인지 기독교의 문화와 신앙이 자연스레 입혀졌다. 학교에 들어가고 성장을 해가면서도 나는 매주 교회에 나갔다. 사회에선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장소와 환경이 변해갔지만 교회에선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만 조금씩 바뀌는 작은 변화만 있었다.                          


© intmurr, 출처 Pixabay


                                   

특히 중학교때부터는 교회 성가대를 하게 되었는데 너무 일찍부터 중요한 위치를 맡아서인지 그 소중함을 잘 몰랐다. 어떤때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열심히 하다가 또 어떤때는 뛰쳐나가기 일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나이일수도 있겠다 싶지만서도 같은 나이에 묵묵히 반주하는 친구를 생각해보니 내가 좀 부족했단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그 교회에서 유치원부터 성인이 될때까지 성장을 했고 그 교회는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나는 내 삶의 일부분인 그 교회로부터 탈출하는 꿈을 꾸었다. 그 탈출이 성가대인지 교회 자체인지는 모르겠지만.                     


© seemoris, 출처 Unsplash

                               

드디어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나이 서른에 천사같은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결혼을 하면서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원하던 자유를 찾았다. 성가대를 비롯한 교회에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게 되었고 교회를 나가는 것도 매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정에 따라 가능하면 참석하였다. 그렇게 10년을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처음엔 그런 삶이 참 좋았다. 나를 구속하는 책임감도 없고 의무감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몇년이 되자 점차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불안함이 고립감으로 느껴지고, 소외감으로 느껴졌다. 내가 원해서 뛰쳐나온 조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후회가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나는 올 2월 지금 다니는 교회에 성가대원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순전히 내 의지로 신청을 했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이고, 생명과 진리 그리고 나의 사명(말과 글 그리고 행동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자) 을 이루기 위한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 '자유로부터의 도피' 를 했다.




                                                         

근대인은 개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개인을 속박하던 전(前) 개인주의 사회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 즉 개인의 지적·감정적·감각적 잠재력의 표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직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 고립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개인이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 / 자유로부터의 도피 <초판 서문> 16p 중에서  / 휴머니스트>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이 책은 1941년도에 씌여졌다. 190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에리히 프롬이라는 작가는 정신분석의로써 1933년까지는 독일에 살다가 시카고 정신분석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치정권으로부터 탈출을 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상인 중세시대, 2차세계대전, 종교개혁 등의 이야기가 많아 전반적으로 무겁고, 어려운 단어 투성이라 읽기가 정말 어려웠다. 더군다나 기독교인으로서 보는 종교개혁이야기 라던지, 현대인으로 보기에 조금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어 머릿속에서 충돌이 일어나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사회현상을 계층적으로 나누어 그 심리를 파악하고 분석한 점,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또 다른 권위주의를 찾아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가 되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은, 78년전에 쓰여진 이책이 왜 오늘날에도 읽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
<출처 : 두산백과>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물론 예전에 비해서 그렇단 말이다. 돈이라는 구속만 없다면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수가 있다. 그런 이유에선지 요즘은 혼여, 혼술, 혼밥, 혼영 등의 단어가 유행하고, 혼자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행동하는 것을 SNS에 공유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내가 가진 자유를 자랑하는 것일까? 내가 속해 있던 곳으로부터의 탈출을 자랑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SNS상의 공간은 또다른 구속이 아닌가? 내가 올린 게시물을 몇명이나 봤을까? 좋아요는 몇명이나 눌렀나? 하며 내가 올린 게시물을 보고 또 보고, 다른사람은 어떤 자유를 만끽하고 있나? 하며 다른 사람들의 게시물을 쓱쓱 찾아보는 그 행동들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가 있을까?                        


© miguel_photo, 출처 Unsplash

                                  

만약에 그런 '자유'라면 다시금 생각을 하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근대인은 전통적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고독해졌고 무력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타인들로부터 소외되어 자기 바깥에 있는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 더욱이 이 상태는 그의 자아를 은밀하게 해치고, 그를 약화시키고 위협하여 새로운 종류의 속박에 기꺼이 복종하게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적극적인 자유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사는 능력과 함께 개인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는 것과 동일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277~278P>


즉 제대로된 자유란 단순히 나를 속박하고 있는 곳에서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내 삶의 가치를 고민할 줄 알며, 그 방향성을 잡아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도 세상을 살다보면 또 어떤 새로운 것들이 나와 우리를 탈출시켜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벗어나기 위한 탈출이 아닌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를 탈출해 민주주의를 살고있는 지금 우리가, 자유의 인간이 아닌 돈이나 언론이라는 또 다른 권위에 자동인형이 된 것처럼 그 때도 그렇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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