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1호선 역사
1990년대 중반, 내가 몸담았던 신화건설은 사우디 정유공장등 플랜트공사와 같은 해외 대형 프로젝트와 국내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건축공사와 주택사업까지 사업영역을 전국적으로 확장하고 있던 도급순위 30위의 중견기업이었다. 1994년 10월, 김포 현장에서 호흡을 맞췄던 박용*기사와 함께 대구로 발령을 받았을 때, 내 가슴은 대구 최초의 지하철을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건설의 핵심기였던 1990년대 중반, 성당못역(현 서부정류장역)과 송현역은 대구 남서부 교통망을 잇는 중요한 거점으로 계획되었다. 1995년은 대구 지하철 1호선 1단계 구간(진천~중앙로) 공사가 막바지 구조물 공사와 내부 마감 공사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으며, 역사(역사)와 철로 구간은 대부분 도로를 점용하여 복공판을 덮어 굴착한 후 구조물을 만들고 다시 흙을 덮는 개착식 공법을 사용했다
우리가 맡은 곳은 대구 1호선 1-3공구에 포함되어 있는 정거장인 성당못역(현 서부정류장역)과 송현역이었다. 토목팀이 뚫어놓은 거대한 콘크리트 박스에 화장하듯이 생명력을 불어넣는 건축 마감 공사가 나의 임무였다. 성당못역은 유려한 곡선형이었고, 송현역은 직선형이었으나 두 역 모두 지표면에서 승강장 바닥까지 심도가 약 22m ~ 24m로 승강장까지 한참을 내려가야 할 정도로 깊고 까다로운 환경이었다.
특히, 성당못(서부정류장) 역은 승강장 형식이 상대식 승강장(Side Platform)으로 R=150m~250m 내외의 급곡선이 승강장 내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Gap)이 타 역보다 넓어 시공 시 발 빠짐 방지와 곡선 구간 캔트(Cant) 조정에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었다.
또한 기술적으로 상당한 난제가 많았는데 첫 번째는 성당못역은 도로 선형을 따라 지하철 노선이 크게 꺾이는 지점으로 승강장 자체가 곡선으로 시공되다 보니, 천정재와 바닥 마감재 시공 시 곡률을 맞추는 것이 매우 까다로웠다. 두 번째는 복합적인 층별 용도였다. 지하 1층은 광활한 대합실. 서부정류장의 유동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출입구 동선이 매우 길게 설계되었고, 지하 2층은 각종 기계실, 전기실, 환기실. 거대한 송풍기(Fan)가 설치되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되지 않는 까다로운 공간이었다.
도시철도 감독관들 또한 서울의 사례들을 철저히 공부하고 온 터라 매우 엄격했다. 그러나 그들과 때로는 공기 압박으로 다투기도 했지만, 대구의 동맥을 만든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든든한 동반자였다.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2분. 내가 근무하던 1-3공구에서 불과 2블록 떨어진 1-2공구 상인동 현장에서 역대 최악의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천공기로 도시가스 배관을 잘못 건드려 배관에 구멍이 뚫림으로써 가스가 누출되면서 발생한 사고다.
이후 가스가 인근 하수구를 통해 지하철 공사장으로 유입돼 원인미상의 불씨에 의해 폭발했고 폭발음과 함께 50m의 불기둥이 치솟으면서 등굣길 학생 43명을 포함해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차량 통행을 위해 공사장 위에 임시 설치한 복공판 400m가 무너진 것은 물론 건물 346채, 자동차 152대가 파손되어 당시 피해액은 540억 원에 달할 정도의 대형사고였다.
사고 당시 철로 구간인 터널 골조공사가 완료되어 전체 공구가 연결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임시벽으로 막혀 있어 가스가 유입되거나, 폭발 당시의 충격이나 진동이 전달되진 않았다. 사고가 난 그 시각에 난 지하에 있었으므로 만약에 우리 공구와 터널구간이 막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어떤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찔하다.
처음엔 사고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했으나, 아침을 먹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마주 한 풍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쉴 새 없이 달려가는 구급차들,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큰 화재가 발생한 줄 알고 식당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말 그대로 지옥 같은 광경이 티브이 뉴스 화면에 나오고 연신 울려대는 삐삐를 통해 쏟아지는 가족들의 확인 전화를 통해 사고를 알게 되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서울에 있던 아내와 지인들이 뉴스를 접하고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그 사고 이후 현장의 공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공기 단축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절대 안전만이 현장을 지배했다. 우리는 매일 가스 검측 기록지를 확인하고 복공판의 작은 유격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짓는 것은 단순히 지하철 역사가 아니라, 대구 시민의 안전과 미래라는 사실을 그 비극적인 아침 이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건설인의 안전과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절감했다.
사고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1995년 6월, 송현역 대합실의 수많은 방화문을 시공하던 중이었다. 이른 아침 도착한 5톤 트럭에 가득 실린 방화문틀을 검사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사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부실한 방화문틀이 가득 실려 있었다. 문틀 내부를 메워야 할 몰탈 사춤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화재 시 시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중요한 방화문이기에, 나는 박기사와 함께 주저 없이 전량 불합격 판정을 내리고 반출을 지시했다. 물론 납품업체는 온갖 핑계와 조치 방안을 들먹이며 제발 받아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나의 기술자 양심과 사명감으로는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분당 현장에서 겪었던 기술자로서의 부끄러운 일을 두 번 다시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떠 올라서이다.
그날 저녁, 사무실로 복귀했을 때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닌 현장소장의 엄청난 질책이었다. 업체 죽일 작정이냐,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며 마치 내가 엄청난 잘못을 한 거 마냥 몰아붙였고, 나의 항변과 설명에도 나를 향한 부당한 비난이 내 기술자적 양심을 건드렸다. 언뜻 생각하면 늘 있는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황당함으로 정신을 잡을 수가 못했다.
남은 일을 동료 박용*에게 짐을 넘기는거 같아 미안한 마음도 많았고, 중도에 포기하는것에 대한 갈등과 원망도 나를 괴롭혔지만 이미 무너진 내 자존심 위에는 아무것도 세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두 아이를 둔 가장인데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그냥 참고 넘기면 되지”라며 주변 동료들의 만류와 설득을 뒤로하고 나는 말없이 보따리를 싸고 사표를 던지는 것으로 답했다. 비참하지만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울산, 분당, 김포현장을 거치면서 나름 제대로 된 기술자라고 꽤 인정받고 있었고, 미래 회사의 주역으로 성장할 꿈과 희망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5년 반 동안 쌓은 모든 것을 잃었고 또 버렸다.
이미 건넌 다리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게 나의 신화건설에서의 불꽃은 끝이 났다.
무작정 사표를 던지고 나온 뒤 3개월의 실직 기간은 혹독했다. 아무런 계획이나 취업에 대한 준비 없이 무작정 퇴사를 하고 보니 2살, 4살의 아이를 키우는 아내는 당장 수입이 끊어진 그 막막함에 가장의 자존심을 이해하면서도 나 몰래 주방에서, 이불속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 솔직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던 아내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대책 없는 가장으로서의 막막함 속에서도 나는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술자가 되지는 않겠노라고 몇 번이고 다독이며 다짐했다.
비록 내가 꿈꿨던 신화건설은 IMF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에 안타깝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시절 현장에서 밤낮으로 우리가 흘린 땀방울은 아직도 곳곳에서 '신화'의 이름으로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