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히말라야 트레킹에 도전한 건 2002년 도였다. 원래는 그냥 포카라에서 푹 쉬다가 카트만두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트레킹 썰'을 하도 듣다 보니 생각이 싹 바뀌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한번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 트레킹을 막 마치고 내려온 여행자가 있어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트레킹은 생전 처음이라고 하자, 그는 대뜸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북 찢더니 쓱쓱 약도를 그려주며 푼힐 트레킹을 추천해 주었다. 요즘은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지만, 200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트레킹에 대한 정보는 흔치 않았다.
지금도 포카라에서 만난 그 여행자가 그려준 약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약도를 볼 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된다. 구불구불한 선을 그린 다음, 중간중간에 점을 찍고, 그 점 옆에 마을 이름과 간단한 정보를 적어 준 게 전부인 약도다.
포카라에서 버스를 타고 나야풀→비레탄티→ 울레리 →고라파니 (푼힐 전망대: 새벽 5시 출발해야 함) →고 라빠니→따라빠니→간드룽 →나야풀 (6시 30분 막차)
지금 보면 허접하기 짝이 없지만, 그 당시 내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정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준비 없이 그 약도 하나만 달랑 손에 들고 푼힐 트레킹을 시작했으니.
다음 날, 나는 포카라에서 로컬 버스를 타고 나야폴이라는 곳에서 내렸다. 길가에 허름한 가게 몇 개가 쭉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한 가게 주인에게 비레탄티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으니, 무표정한 얼굴로 가게 뒷길을 가리켰다. 손동작으로 봐서 가게 옆에 나 있는 언덕길을 내려간 뒤, 산 쪽으로 쭉 올라가라는 뜻인 것 같다.
가게 주인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쭉 올라가다 보니, 팀스와 퍼밋을 체크하는 사무소가 보였다. 포카라에서 미리 받아 온 팀스와 퍼밋을 건네주자, 직원은 수기로 꼼꼼하게 장부에 옮겨 적는다. 체크 포인트 사무소 벽면에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그 게시판에 재미있는 통계가 붙어 있었다. 2001년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장 많이 다녀간 국가별 순위였다. 1위는 독일이었고, 우리나라는 10위였다. 지금은 그 순위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체크 포인트를 지나 비레탄티로 쓰적쓰적 걸어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커다란 짐을 짊어진 서양인 트레커들이 떼를 지어 우르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들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그 뒤로는 서 너 명의 포터들이 더 크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서양인 트레커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포터들의 짐을 지는 방식이 독특했다. 우리는 멜빵을 어깨에 메는데, 여기 포터들은 이마에 메고 있었다. 목이 위험하지 않냐고 물으니, 습관이 돼서 이게 외려 편하단다.
아무튼 그 서양인 트레커들에 비하면 난 지나치게 단출한 차림이었다. 작은 배낭 안에 들어 있는 물품이라고 해 봐야 옷 몇 개와 세면도구가 전부였다. 등산과 관련된 장비는 일체 없었다. 따로 포터나 가이드도 고용하지 않았다. 짐이 없으니 포터는 필요 없었고, 2박 3일밖에 안 되는 초보자 코스를 가면서 가이드를 고용하자니 돈이 아까웠다. 등산복도, 스틱도, 슬리핑백도 준비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출렁다리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국인 아저씨들도 그런 내가 한심해 보였나 보다. 그들은 아무 준비 없이 쓰적쓰적 산을 오르고 있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한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봐, 청년! 잠시만~~ 내가 들고 다니던 이 나무 작대기라도 가지고 올라가게." 라며 들고 있던 나무 작대기를 건넸다. 그때 그 아저씨가 선물한 나무 작대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배는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출렁다리를 건너 얼마나 걸었을까? 이마에서 비질비질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등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더웠다. 히말라야라고 해서 다 높은 곳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해발 1000미터쯤 되는 히말라야 저지대는 의외로 따뜻해서, 낮 기온이 20도까지 올랐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두꺼운 옷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걷자 한결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첫날은 티르케둥가라는 마을의 마운틴 뷰 로지에서 묵었다. 그 롯지는 이층 구조였는데 1층은 식당과 부엌으로 쓰이고 있었고, 2층은 숙소였다. 체크인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문은 모두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는데,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롯지는 벽도, 바닥도, 문도, 침대도... 모두 다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복도를 걷거나, 침대에 눕거나, 문을 열 때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A4 종이보다 약간 두꺼운 합판으로 만들어져 있는 벽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다. 나는 7번 방에 묵었는데, 6번 방 트레커들의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밤에는 옆 옆 옆 방에서 하품하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너무 기가 막혀서 혼자 피식피식 웃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롯지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고라빠니를 향해 출발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고라빠니까진 빨리 걸으면 4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단다.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길의 각도가 점차 가팔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여기부터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는가 보다. 포터도 가이드도 없이 떠난 온 트레킹이었기 때문에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주춤했다. 하지만 올바른 방향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트레커들의 발자국이 많은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나귀들의 똥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당나귀들은 트레킹 코스를 하루 종일 오르락내리락하며 짐을 실어 나른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귀 똥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아무 조짐도 없었는데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금세 당나귀 똥과 트레커들의 발자국을 덮어 버렸다. 눈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또 갈림길이 나타났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갈림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 10분쯤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멀리서 여성 트레커 두 명과 네팔리 가이드 한 명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기발한 생각이(얍삽한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옳지, 저들을 따라 올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내가 인사를 하자 두 명의 여성 트레커들은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일본인들이었는데, 마침 그들도 푼힐까지 갔다가 ABC 베이스캠프로 가는 여정이란다. 그들은 가이드를 따라 왼쪽 계단을 향해 올라갔다. 나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내 불손한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쉬며 나도 쉬고, 그들이 걷기 시작하면 나도 따라 걸었다. 그렇게 뒤에서 얼마를 쫓아 올라갔을까. 갑자기 앞서가던 트레커 한 명이 나에게 말을 붙여왔다.
“저희들하고 같이 가요. 우리 가이드 람도 괜찮대요.”
흰 모자를 쓰고 피부가 하얀 여성이 아키였고, 빨간 점퍼를 입은 여성의 이름은 쿄코였다. 가이드인 람이 먼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람은 인상이 좋고 건강해 보이는 네팔리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들과 일행이 되어 함께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울레리에서 고라빠니까지 올라가는 4천 개의 돌계단은 말 그대로 지옥의 코스였다. 설산은 코빼기도 안 보였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건 오직 끝없이 이어진 돌계 단 뿐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가이드인 람에게 언제쯤 도착하느냐고 물어봤다가 더 심한 절망감을 느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벌써 3분의 1은 올라왔는걸요.”
눈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서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오후 4시가 지나서야 겨우 고라빠니 힐탑 롯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힐탑 다이닝 룸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트레커들이 난로 앞에 모여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우리가 머리에 눈을 뒤집어쓰고 문 안으로 들어서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박수를 쳐 주었다. 힐탑 다이닝 룸에서 몸을 녹이려면 4000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와야만 한다. 먼저 도착해 있던 트레커들은 모두 그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이었기에, 방금 도착한 우리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난 방에 배낭을 던져 놓자마자 샤워용품을 집어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이대로 땀에 젖은 채 앉아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주인아주머니에게 “핫 샤워?”라고 묻자, 숙소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건물 뒤편에 있는 샤워실 인테리어는 역시 예상대로였다. 철판으로 대충 지은 샤워실은 옷을 입고 있어도 추웠다. 드문드문 뚫려 있는 못 구멍으로 히말라야의 칼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샤워를 하고 나갈 요량으로 서둘러 옷을 벗고 물을 틀었다.
요즘은 태양열을 이용하는 순간온수기가 달려 있어서 돈만 내면 핫 샤워가 가능한 롯지가 꽤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예 샤워실이 없는 롯지가 부지기수였다. 샤워기를 틀자 찬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최대한 신속하게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칠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갑자기 샤워 꼭지의 수압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린애 오줌 줄기 같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누굴 부를 수도 없고.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몸에 묻은 비누거품을 닦아내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물줄기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압 때문에 이리저리 춤을 췄다. 그 물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쁘게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비누거품을 닦아내야만 했다.
힐탑 롯지의 다이닝룸에는 난로가 딱 하나 있었는데, 몸을 녹이기 위해 몰려든 트레커들이 난로를 빙 둘러싸고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으면 몸살이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누군가 야크 똥과 장작 몇 개를 난로에 던져 넣자, 몸이 샤르르 녹는 느낌이 들었다.
밤이 깊고 난로의 온기가 식자 트레커들은 하나 둘 방 안으로 흩어졌다. 그날 밤 히말라야의 눈보라는 정말 대단했다. 바람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내가 묵은 방은 전망을 위해 한쪽 면을 유리로 마감했는데, 그 유리 두께가 너무 얇았다. 게다가 곳곳에 틈새가 벌어져 있어서 눈보라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 와 쌓일 정도였다. 가지고 온 옷을 다 껴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썼지만,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추운 밤이었다. 불을 끄자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계속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문득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진다. 누구라도 좋으니, 지금 이 벅찬 감정을 나누고 싶다. 하지만 히말라야 산속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온전히 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시간. 그 묵직한 고독 속에서 내 인생의 가장 외로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