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외과에서 허리 통증 치료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여행 날짜는 다가오는데 허리는 나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걱정은 쌓여간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딸에게 물어봤다.
“오늘 취소하면 위약금을 얼마나 내야 하니?”
“거의 못 돌려받을 걸.”
“그래? 어떻게든 가야겠네.”
“좀 힘들어도 가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만 몸이 잘 버텨줄지 모르겠네.”
올 초부터 5개월에 걸쳐 자격증 하나를 따고, 이어 2개월 공부하고 다른 자격증 하나를 더 땄다. 아빠가 합격하면 해외여행을 보내주겠다며 딸이 자청하고 나섰다. 그 말이 기특하긴 했지만 그게 현실이 될까 반신반의했다. 난 합격했고, 딸은 여행사에 예약해서 결제를 마쳤다. 작년엔 아빠 엄마를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사이판에 보내주더니 이번엔 일본에 보내주겠단다. 그 성의를 봐서라도 이번 여행을 잘 마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출발 당일, 허리 통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기로 했다. 바르는 파스와 붙이는 파스, 핫팩, 복대를 준비했다. 이것은 물리치료사도 권장했던 도구들이라서, 이 모두를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통증을 가라앉히리라 마음 먹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절차를 마치고 게이트 앞에서 대기할 때까지도 통증은 계속되었다. 단 몇분이라도 허리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다인승 의자에 길게 누워 있다가 맨 마지막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서도 묵직하게 허리 통증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여행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일본에 도착하고 전용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체중으로 내리누르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점차 정신이 육체를 제어해나갔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육체의 고통을 조금씩 경감시켜줌을 느끼면서 말이다.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라에서 도다이지와 사슴공원을 구경하고 오사카로 이동했다. 도톤보리street 에서는 오사카의 활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한국의 명동과 같은 거리다. 북적거리는 분위기와 화려한 거리도 마음에 들었지만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살아 숨쉬는 생명력이다. 젊음이 뿜어내는 활력이 긍정적인 기운을 전해주는 듯하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외국인들, 주고 받는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맛집 앞에 늘어선 긴 대기행렬, 사진 셔터를 분주히 눌러대는 손놀림 등, 눈과 귀에 들어오는 정보를 기억으로 깊이 각인시키려 노력했다. 여행을 마치면 이 모든 기억이 추억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짧은 여행 뒤에 오는 아쉬움은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라 순간 순간을 애써 잡아두고 싶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어서 더욱 그 집착은 강했다. 도톤보리 street에서 느꼈던 강렬한 인상은 태국 파타야의 walking street를 떠올리게 했다. 10년 전 태국에서 받았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이어서 신사이바시와 미도스지 거리의 일루미네이션을 감상하고 하루 일정을 마쳤다.
둘째 날은 오사카에서 교토로 이동, 금각사에서 금으로 도금된 신사를 구경하고, 야사카 신사를 거쳐 일본식 거리에서 갬성(?) 사진을 찍었다. 일본 영화에서 봤던 갬성(?) 골목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어서 기모노 포레스트에 가면 특이한 구경 거리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놀랄만한 볼거리는 없었고, 대신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기모노 포레스트는 관광지다. 그런데 그 안에 귀엽게(?) 생긴 기차 한 칸이 있길래 당연히 모형 기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차 앞 철로를 밟고 돌아다니면서 이리 저리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모형 기차 안에서 커피나 다과를 팔겠거니 하고 기차 안에 들어서려는 순간 흠칫 놀랐다. 정장을 하고 앉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일터에 가기 위해 진지한 얼굴을 하고 기차가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잔망스럽게 포즈를 취하며 철로에서 사진을 찍었던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헉헉. 이게 진짜 기차였다니……. 잠시 후 기차는 유유히 떠났다.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치쿠린)으로 가는 도로 양편으로는 맛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지나가는 손님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도게츠교와 노노미야 신사를 구경하고 하루 일정을 끝냈다.
셋째 날은 귀가하는 날이라 특별히 추억에 남을 사건은 없었지만. 그 즈음해서 내 허리 통증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허리 통증 때문에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려고 대기실 의자에 드러누워 있었던 사람이 3일 만에 멀쩡해질 수 있다는 것은 미스테리에 가까웠다. 그것도 가만히 누워 휴식을 취한 게 아니라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장시간 걸었으니 말이다.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무리하지 않고 누워서 쉬는 게 답이라고 한다. 후에 물리치료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치료 중에 여행을 다녀와서 통증이 더 악화되는 환자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자가 치료를 하고 온 셈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최대한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파스를 붙이고, 핫팩을 덮고, 복대까지 하고 다녔으니 내가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결국 답을 찾았다. 한 마디로 ‘생명력’에 단서가 있다. 도톤보리 street에서 몸으로 느꼈던 살아숨쉬는 생명력, 태국 파타야 walking street에서의 추억 소환, 관광지에서 찍었던 갬성 사진들, 사람들의 웃음 소리, 맛있는 음식, 여행이 주는 여유로운 정신, 병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력, 이 모든 것들이 오케스트라와 같이 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잊게 한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때 그 생명력이 면역력이 되어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값진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