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방치되다시피한 기구에 올라타 운동을 시작했다. 격렬한 운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가볍게 운동하면서 영화도 감상하는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다. 기구에 태블릿을 셋팅해놓고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영화들을 검색했다. 언제부터인가 애니메이션을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50대 후반의 중년 아저씨가 굳이 아이들이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연인이 되고 싶어서’ 다. ‘자연인(자유인)’의 개념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더 좁혀서 표현하자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다는 열망이라고 하겠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를 설명하는 단어는 매우 다양하다. ‘어머니의 아들’, ‘한 집안의 가장’, ‘아내의 남편’, ‘딸의 아버지’, ‘회사의 대표’, ‘글쓰기 강사’, ‘한국인’, ‘동양 사람’ 등등. 그러나 나의 본질은 내 속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서 정의한 내 역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속되거나 정의된 사람이 아니라, 광막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점을 점유하고 있는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야 마땅하다.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할 곳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많은 영토를 소유한다 한들 나는 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점과 같이 감싸고 둘러 삼킨다. 사유에 의해 나는 우주를 포용한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 자연인(자유인)이 되고 내 본질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동심을 회복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더 다가가는 일이 되지 않을까?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통해 천국의 형상을 떠올려보고,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웃음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 우리 모두 한 때는 아이였다.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던 적이 있다. 물론 오래 전의 일이지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번민과 고통, 근심과 절망이 시작된 시기가 언제부터였는지 묻고 싶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뛰놀던 때도 이러한 번민이 있었을까? 그건 아니다. 내 기억으로는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의무가 생긴 때’ 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학교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학교에 가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등등, 의무가 주어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수고와 노동이 의무로 다가오면서부터 번민과 근심이 시작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나선 취업을 해야 했고, 그 다음은 결혼, 그 다음은 출산, 그 다음은 집 장만, 그 다음은 안정적인 수입... 등등 끊임없이 해결해야 할 일들과 의무가 주어졌다.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업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우주의 합목적성에 부합하는가 성찰해볼 일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넷플릭스에는 가슴 따뜻해지는 애니메이션 가족 영화가 신작으로 많이 올라온다. 이런 영화 속에서 내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만화의 ‘배경’으로 나오는 풍경이다. 이러한 만화의 배경에는 보통 밝고 명랑한 색을 사용할 뿐 아니라, 정감 넘치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나오는 긍정적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어쩌면 그 에너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닐까?
강렬한 햇빛이 가득한 넓은 광장 중앙에는 분수가 솟아오르고, 어린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재잘대고, 마술하는 아저씨, 보드 타는 아이들, 춤추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른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담소를 나누며 거리를 활보하고, 빨갛고 노랗고 새파랗게 칠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은 또한 얼마나 정겨운가. 애니메이션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원초적 자아를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