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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들으면 힐링되는가?

by 민경호

독서토론 모임을 마친 뒤 이어진 회식 모임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치킨과 맥주가 나왔고, 못 다한 토론을 이어가기라도 하듯 다양한 소재가 등장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내뱉은 화두는 일동을 당황하게 만들었을뿐 아니라 순간 얼어붙게 했다. 그동안 나 혼자만 생각해왔던 주제를 던져보고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사람들이 슬픈 감정을 느낄 때 슬픈 노래를 들으면 힐링된다고 하는데 저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노래’라는 건 기뻐하기 위해서 부르고 듣는 것 아닌가요?”


찬물을 덮어쓴 듯 좌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그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내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원래 ‘노래하다’라는 동사는 기쁨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 아닌가요? 영어로는 ‘sing’이죠. 그러면, 문장을 예로 들어볼게요. ‘기쁨을 노래하다’라는 문장과 ‘슬픔을 노래하다’ 라는 문장 가운데 뭐가 더 어울리나요? 아니, 더 어울린다고 하니 좀 이상하게 들리네요. 그러면 ‘종달새가 노래한다’는 문장은 기쁨을 표현하는 문장인가요? 슬픔을 표현하는 문장인가요? 좀더 확장해서 ‘새가 노래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나요? ‘새가 운다’고 표현하는 게 맞나요? 한국적 정서로 표현한다면 ‘새가 운다’고 하겠죠. 그렇다면 ‘노래’의 본질을 한번 따져볼까요? 노래의 본질은 ‘기쁨의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좌중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그들에게선 내 말에 동의한다는 신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한 논리로 동의를 이끌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듣는 행위는 그 슬픈 감정을 증폭시킬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대 논리가 더 우세했기에 말을 계속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주장할 때가 많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인정한다. 비단 이 문제 하나에 국한된 게 아니라 수많은 명제에서 난 일반 대중과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이것을 나만의 독창성 내지는 개성, 남과 다른 특성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던 중,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은 후로는 내가 그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위안이 되기도 했다. 잡스가 말했다.


“Think different.”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창의’의 시작이고 개혁의 출발점이다. 기존의 상식과 선입견을 모두 떨쳐버리고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접근해보라는 것이 바로 잡스가 생각하는 ‘창의’다.


회식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하고 난 다음에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당연히 반대 논리가 펼쳐졌다.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듣는 것이 심리적으로 치유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는데 이를 ‘감정 조절’이나 ‘감정 공감’의 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슬픈 노래는 자신의 감정을 더 잘 표현하고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음악의 가사나 멜로디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면 이를 통해 억눌린 감정을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있다고 한다. 슬픈 노래에는 공감과 위로, 카타르시스 효과와 스트레스 감소 효과가 있다는 논리였다.


일견 그럴듯하다. 하지만 내게는 공감과 위로 보다는 슬픈 감정이 증폭되어 우울함을 악화시키는 역효과가 더 크게 와닿으니 어쩌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쌍둥이를 제외하고, 지구상에 사는 80억의 사람들은 같은 모양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은 논리로, 80억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인격체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혼자 살아야 할 것이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내 주변에 있길 원한다면 나와 또같은 복제인간을 만들든가, 로봇을 만들어 옆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소수의 의견이 무시당하고 짓밟힐 수 있다는 한계도 분명히 갖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하도록 한다면 오늘 당장은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덜 행복해지고 곤란해질 것이다.”

“내가 다른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내 독립은 권리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개인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


여지껏 본의 아니게 내가 주장하는 논리들 중 상당수는 소수 의견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난 괘념치 않는다. 그게 바로 나고, 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잣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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