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신문[금요 에세이]/일월 살구나무집

by 현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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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일월 살구나무집



포근하다. 친정집에 들어선 기분이랄까. 앙상한 가지만 남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섰다. 찬바람이 잔가지를 흔들어도 사이사이 햇살은 따사롭다. 이곳에 잠시 머무른 기억을 다들 잊지 못한 눈치다. 소박한 반찬에 스며 있는 손맛에서 저마다 유년의 한때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때가 작년 유월쯤이고 지금은 새해 일월이다.


점심 주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은 채, 이곳저곳을 먼저 돌아본다. 마당 한 곳에 놓인 작은 연못 물이 두께를 자랑하듯 꽝꽝 얼었다. 얼음 썰매를 타고 놀던 옛이야기가 시작되자, 누군가는 얼음 위로 올라가 콩콩 쿵쿵 뛴다. 낮에 실컷 놀다가 돌아와 잠이 들락 말락 할 즈음 어김없이 들려오던 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듯하다.


집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살구나무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따로 있다. 아름드리 솟아오른 목련 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한두 해 자란 키가 아님을, 나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이가 봐도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다. 짙푸른 하늘로 시원스레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이 믿음직스럽다. 저마다 봉긋한 봉오리를 받쳐 든 모습이 진풍경을 이룬다.


삼월 목련꽃만 꽃인 줄 알았다. 일월 한가운데서 보는 목련과 꽃은 눈으로 보는 것 너머에 있는 것까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한참 섰다가 마당에 마련해 둔 의자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는다. 목련이 잘 보일만한 거리에서 오래, 올려다본다. 봉오리도 꽃이었어. 추위를 견뎌내느라 한껏 오므리고 있을 뿐인 목련꽃. 어떤 깨달음처럼 스친다.


일월 목련은 삼월 목련을 알고 있을까.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듯 활짝 핀 제 모습을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풀과 꽃 그리고 나무가 사는 세상에도 맞아떨어지는 이치라 우긴대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해를 거듭해 온 나무는 알 수도 있을지언정 봉오리는 도무지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꿈을 꿀 수는 있으리라.


봉오리를 꿈꾸는 꽃이라 한다면 어떨까. 활짝 피어나기를 꿈꿀 때도, 꿈을 이루었을 때도 혹여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꽃은 꽃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월이 아니었다. 꿈꾸는 나무들을 보듬어 안고 햇살을 비추고 또 데우고 있었던 거다. 더러 분주하기도 했을 텐데. 눈치를 못 챌 만큼 고요하기만 하다니.


일월은 그런 때인가 보다. 다 떠나보내고 홀로 고요한 시간. 가만히 서서 꿈 꾸는가 하면 삼월이 되어야 비로소 보이는 그런 시절. 무엇이든 허투루 볼일이 아니다. 아니 허투루 볼만큼 사소한 일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스치고 지나간 바람 한 점에도, 가지 사이를 비추는 한 줌 햇살에도 그럴만한 까닭이 깃들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거 같다.


일월 살구나무집에 왔다가 일월과 일월 목련을 만났다. 뜻밖에 받은 선물 같기에 마음은 삼월인 듯 환하고 따스하다.


현경미 수필가(2024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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