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에 이르길 무간지옥에 들어간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며, 무간지옥에서 극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영화 "무간도"의 서두에 등장하는 무간지옥에 대한 설명은 의미심장하다.
경찰이었던진영인(양조위)과 조직원이었던유건명(유덕화)이 서로 상대방의 진영에서 십여 년간 첩자로 살아온 삶 자체가 이미 그들에게는 무간지옥과 다름 없었다. 항상 몸 하나 편히 뉘지 못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에 놓인 건 동일했으나, 두 명의 행보는 극명하게 갈린다.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가졌던 첫 만남. 다가올 미래를 모른 채 음악과 스피커에 대해 논하던 유건명과 진영인의 몇 안 되는 평화로운 순간.
이렇게 진영인과 유건명의 운명을 가른 건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작용했겠지만, 그들의 자기 신념(自己信念)과 신의(信義)가 큰 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 자기 신념(自己信念)
자기 신념의 측면에서는 상황적으로는 진영인이 훨씬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영인이 유건명을 한참 앞질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진영인의 모습은 일개 깡패일 뿐이다. 사람을 패고,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살이를 하고, 이런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는지 영화 초반에는 그가 황 국장에게 우는소리를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십 년 가까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도 그 투덜거림은 여전해 보였다.
옥상에서 황 국장을 만나면 언제나 투덜거리던 진영인.
그러나 그의 눈에는 흔들리지 안은 확고함이 깊게 서려 있었다. 국가를 위한다는 면에서 명분적으로도 좋은 위치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은 경찰이라는 자기 신념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진영인은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그의 신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후반부에 유건명이 조직원임을 알게 되어 협박하며 불러냈을 때이다.
미안하지만 난 경찰이야.
유건명이 피식 웃으며 네가 경찰인 걸 누가 아냐며 도발하자 그에게 총구를 겨누며 진영인은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진영인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유건명을 눈앞에 두고도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굳은 신념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유건명의 도발에 순간 총구를 머리에 겨누던 진영인. 경찰은 살상이 목적이 아니기에 머리에 총을 겨누면 안 되지만, 기나긴 조직 생활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어 버린 모습이 엿보인다.
한편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진영인의 이 말은 후에 유건명에게 트라우마와 다름없는 후폭풍을 안겨준다. 진영인과 반대로 유건명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양상을 보인다. 처지 자체는 훨씬 나았으나, 이러한 좋은 상황이 되려 유건명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다. 경찰로서 유능한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신혼집을 차리며 즐거워하는 생활은 '조직의 첩자'라는 실체만 덮어놓고 보면 참으로 완벽한 삶이다. 경찰이 그의 조직을 치려고 할 때만 훼방을 놓거나 미리 정보를 내주는 일 외에는 유건명은 더없이 훌륭한 경찰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런 평온한 삶에 대한 욕망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잠식해가고 있던 걸까.
조직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반듯한 경찰의 공기만이 유건명의 주위를 두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단추가 어긋나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택하라던 한침의 말과는 달리, 유건명은 조직의 뜻대로 첩자가 되어 경찰 학교에 입학한다. 진영인이 퇴교당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이 대신 나가고 싶다며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서는 조직의 첩자로서의 신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마음을 잡지 못했는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눈이다.
가지고 있던 신념이 흔들리거나, 혹은 애초에 신념 자체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자는 부화뇌동하는 선택을 하기 십상이다.
시간이 흘러 머리가 큰 유건명은 한침의 기대를 저버리는 제3의 선택을 한다. 영화 말미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사건에서는 상대방과 보는 사람이 예상할 법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또 다른 제3의 길을 택한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선택하라"던 한침의 말을 실행에 옮기기는 했으나 조금은 비뚤어진 형태로 나타나 버리고 말았다. 더불어 그 선택을 뒷받침할 신념을 끝끝내 갖지 못한 채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더 깊은 무간지옥 속으로 들어가는 유건명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첫 부분과 동일한 장면이 수미상관으로 등장한다. 유건명은 경찰학교에 입학했을 때와 같은 마음이나, 벗어날 수 없는 처지임을 암시한다.
2. 신의(信義)-믿음과 의리
자기 신념과 함께 진영인과 유건명의 인생을 가른 다른 큰 한 축은 윗사람, 혹은 상관에 대한 신의(信義)였다. 진영인과 황 국장, 유건명과 한침은 서로 대칭이 되는 관계이다. 황 국장은 진영인을 첩자로서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조직에서 첩자의 삶을 살게 했고, 한침은 유건명을 경찰 학교부터 입학시켜 유능한 경찰이라는 이름 하에 은밀하게 조직의 첩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경찰학교 시절, 진영인의 재능을 알아본 황 국장.
진정한 속 사정은 "무간도 2"를 보고 나서야만 이해할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진영인의 황 국장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첩자 생활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며, 정보를 물어봐도 모른다고 퉁명스레 대꾸하지만 바로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렇듯 진영인의 충실한 행보는 그의 황 국장에 대한 믿음도 있지만, 황 국장이 진영인을 무심한 듯 챙기는 모습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도청기는 싸구려를 주면서도, 진영인의 생일이라며 슬쩍 함께 넣어둔 시계의 존재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대한 진영인과 황 국장의 대화가 참 재미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지 몰래카메라이냐고 묻는 진영인에게 황 국장은 무심히 이제 생일이지 않냐며 대답하고, 진영인은 시계는 안 찬다고 입을 비쭉이면서도 챙겨 넣는다. 후에 상담 치료를 받으러 가서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진영인의 모습이 눈여겨볼 만하다. 각자의 진영에서 첩자를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중에, 황 국장과 진영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옥상에서 다시금 만남을 가진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황 국장이 진영인의 신변을 걱정해 더 이상의 임무는 수행하지 말고 몸을 빼라 권하는데, 진영인이 어찌 황 국장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프리퀄인 '무간도 2'에서 나온 과거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황 국장의 이런 행동은 천지가 개벽한 수준이지만, 과거의 일이 있었기에 비온 뒤 땅이 굳어지듯 황 국장과 진영인의 사이도 더욱 단단해졌을 테다.
반면 유건명과 한침의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충성스러웠지만, 실상은 자신의 안녕을 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나치게 냉철했던 한침은 유건명을 평소에는 방임하다가 필요할 때 이용해 먹기를 반복한다. 유건명과의 통화 내용을 녹음해두는 그 철저함에서는 아랫사람, 혹은 부하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드러난다. 즉, 애초에 믿음조차 주지 않는 비정하고 또 비정한 인물이 바로 한침이었다. 유건명은 조직에 들어온 이상 두목인 한침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따라왔지만, 경찰로서 지위와 입지를 점점 굳혀가며 조금씩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첩자를 색출하는 데 동원되며 그의 고뇌는 더 깊어간다. 경찰 내에서 누가 첩자인지 알아보기에는 권한도 없고 위험성이 있음을 알렸지만 한침에게 그건 유건명의 사정이었지 한침이 알 바가 아니라는 투로 일관한다.
첩자 색출을 위해 한침에게서 조직원의 정보를 넘겨받은 유건명.
결국 유건명은 위험을 감수하고 황 국장을 미행하는 강수를 두고, 이는 그가 예상치 못한 사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한침의 극단적인 선택에 유건명은 그럴 필요가 있었냐며 이제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하지만, 볼 일을 다 마친 한침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얘기하기 전까지는 경찰 일이나 훌륭히 수행하라며 무심히 대답한다. 이 순간 유건명은 한침에게 충성할 명분을 잃었음을 한침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다.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고 하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안녕이다. 이후로 유건명은 허울뿐인 신의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안녕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무간도'는 치밀하게 잘 짜여진 첩보 느와르 영화로, 보는 사람을 시종일관 긴장시키는 쫀쫀함과 속고 속이는 심리극이 백미(白眉)인 작품이다. 이런 작품 자체의 높은 완성도와 더불어 진영인과 유건명, 두 인물이 다르게 보여주는 인물성과 주변 사람들과 맺은 관계성을 곱씹어 보는 것 또한 손에 꼽고 싶은 즐거움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