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1988) 토머스 해리스
여자들을 납치해 피부를 벗겨 죽이는 '버팔로 빌' 사건의 희생자는 다섯 명으로 늘어난다.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정신질환 범죄자 수감소를 방문한다. 한 수감자에게 희미한 실마리라도 얻어 보기 위해서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스탈링은 옆 감방의 또 다른 죄수 믹스에게 봉변을 당한다. 무례의 대가로 믹스는 곧 죽음을 맞는다. '오직 말만으로' 믹스의 심리를 조종해 자살하게 할 정도로 악마적인 천재성을 지닌 남자의 정체는 한니발 렉터 박사. 『양들의 침묵』은 한니발 렉터 4부작 중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자신에게 맞서면 누구든 죽이거나 먹어 버리는 한니발 렉터도 스탈링에게는 소통을 허락한다. 심지어 손가락이 살짝 닿는 정도지만 둘 사이 무려 신체 접촉이 일어나기도 한다. 소시오패스 살인마에게도 감정을 놓아둘 마음속 작은 한구석이 있는 것일까. 물론 렉터는 스탈링을 재미있는 놀잇거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조금씩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스탈링은 이런 괴물과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상원의원의 딸이 희생되기 전에 버팔로 빌을 잡아야 한다. FBI 내부의 관료주의는 풋내기 연수생을 근본부터 흔든다. 필요없는 감정을 얼려 버리고 오직 논리에 따라 침착하게 난관을 헤쳐나가는 스탈링의 수사는 범죄 소설의 교과서라 부르기 손색없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도 현상이라 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는 원작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른다. 그렇다고 영화를 먼저 본 것이 소설 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기자 출신인 작가의 차분하고 정확한 서술은 엽기적 범행의 비현실감을 상쇄한다. 선 굵은 캐릭터들과 그들 심리의 묘사 또한 입체적이고 강력하다. 스탈링의 불안, 크로포드의 고독, 둘 사이의 신뢰 그리고 렉터의 광기와 버팔로 빌의 갈망까지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최악의 악당' 단골 1위 한니발 렉터는 또한 극도로 모호한 캐릭터다. 백과사전을 머리에 집어넣은 것 같은 방대한 지식과 초월적 직관은 독자를 매료하지만, 그는 식인 살인마다. 이처럼 책은 사이코 스릴러 장르의 출발점이자 완성작이라는 모순을 내포한다. 매력적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작품은 이 책 하나로 충분함을 스스로 선언해버린다. (후속작 『한니발』조차도 소시오패스 살인마 소설의 피로와 한계를 드러낸다.) 이로써 『양들의 침묵』은 소설 속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표본들과 같은 계보학적 중요성을 얻게 된다. 사이코 스릴러 분야의 몇 안 되는 중요 보존 대상으로 등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