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조커(1997) 다카무라 가오루
항상 깨끗하게 세탁한 하얀 스니커즈만 신는 강력계 형사. 이혼남인 그는 혼자 산에 오르는 것과 바이올린 연주를 즐긴다. 꿈틀거리는 정념을 냉철한 이성으로 거칠게 억누르곤 한다. 하지만 가장 위계가 강한 조직인 경찰 안에서도 개인의 색깔을 지우지 않는 고양잇과 인물이기도 하다. 판단력과 수사력은 최상급. 일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거장 다카무라 가오루가 창조한 캐릭터 고다 유이치로의 스케치다. 그가 처음으로 활약한 『마크스의 산』은 겨울 산의 혹독한 추위와 아지랑이 끓는 한여름 더위를 왕복하는 극단의 강렬함으로 독자의 얼을 빼놓았다.
작가는 '고다 형사 시리즈'의 첫 두 편 『마크스의 산』과 『조시』에서 악마적으로 세밀하고 방대한 묘사와 과감한 이야기 전개로 거칠고 원초적인 특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한번 빠져들면 깊게 중독되는 마성을 선보인 후 세 번째 작품 『레이디 조커』에서 지향한 건 '총체성'이다.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납치사건을 통해 전후 일본 현대사의 민얼굴을 가감 없이 파헤쳤다. 대형 스캔들과 함께 출렁댄 정·재계, 범죄 세력, 언론, 경찰 등 온갖 조직 및 집단의 생태를 극사실적으로 재현했다. 온 사회를 묘파하고자 한 작가적 야심을 박력 있게 내질렀다.
납치범은 취미가 경마인 점만 공유하는 평범한 다섯 남자다. 그들은 굴지의 맥주회사 히노데의 사장을 납치하지만, 곧 풀어준다. 보통의 납치극과 달리 의도를 읽기 어려운 모호한 메시지에 수사는 혼란에 빠진다. 범행 동기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불장난하듯 사건을 모의하고 실행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한 재산 거머쥔 자들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길 원했다. 같은 경찰 조직의 엘리트 동료가 맛볼 좌절감을 상상하며 황홀을 느낀 범인도 있다. 계산하는 이성이 아닌 충동과 직관 역시 삶을 이끄는 강력한 기준임을 보여준다.
해괴한 범죄 조직 '레이디 조커'를 가장 닮은 인물은 정반대 위치에 있는 형사 고다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생각을 하는 것에,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에 질려 버린 상태. 거대 범죄가 발산하는 비현실의 감각에 홀려 수사에 몰입한다. 물론 이 마음의 공동은 절대 메워지지 않고, 파멸적 인질극이 종료된 뒤에도 불길함은 지속한다. 세상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미스터리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존재에게 절망을 안기기도 평안을 허락하기도 한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불가해함. 『레이디 조커』를 통해 체감하게 되는 삶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