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1953) 레이먼드 챈들러
장 피에르 멜빌이 감독한 <암흑가의 세 사람>의 오프닝. 호송 중이던 열차에서 탈출한 보젤은 오늘 아침 출소한 코레의 차 트렁크에 몰래 몸을 숨긴다. 숲속 들판에서 마주한 둘. 코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르는 남자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던진다. '이거 피면 우리 나쁜 일 하는 거다.' 눈빛 만으로 의기투합한 남자들은 보석상 강탈 계획을 세운다. 멜빌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책을 읽었던 것일까. 『기나긴 이별』의 탐정 필립 말로도 클럽 앞에서 만취해 쓰러진 남자 테리 레녹스에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푼다. 두 남자는 친구가 된다.
코레와 보젤처럼 말로와 레녹스도 위험 위를 걷는다. 억만장자 재벌 할란 포터의 사위인 레녹스는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한 용의자로 몰린다. 멕시코로 도주하는 그를 말로는 대가 없이 협력한다. 친구가 자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러나 말로는 재계 거물, 경찰, 갱들의 만류와 협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건을 파고든다. 돌아오는 이득은 없고 위험은 사방에 있는데 왜 손을 떼지 않는가. 테리 레녹스가 자신처럼 거리의 논리에 물들지 않은 초연한 존재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직감은 확신이 된다. 탐정은 의심 없이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처럼 필립 말로의 내면은 순수하다. 달리 말하면 미성숙하고 소년답다. 남녀 가리지 않고 혐오 발언과 도발을 쏟아내고, 침대에서도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냉소로 온몸을 휘감은, 말보다 주먹은 더 세서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폭력을 퍼붓는 마흔두 살 남성을 소년 같다고 할 수 있는 이유. 기성세대 중년은 이렇게 내키는 대로 지르며 살 수 없다. 결혼도 안 했고 가족도 없다. 어른이 아닌 해적이 되고 싶었던 소년의 마음 그리고 사회 통념을 지키며 '남들처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작가가 투영하여 탄생한 캐릭터가 필립 말로다.
말로는 해결사 조직의 요원으로부터 '외톨이 늑대'라는 말을 듣는다. 늑대 같은 남자가 밤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폭력, 치정, 추문을 뒤쫓는다. 팜 파탈을 마주하고 남자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한다. 곧 죽어도 독설을 내뱉으며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 자기만의 공간으로 복귀한다. 이것이 하드보일드고, 이 장르의 원형을 정립한 장본인이 챈들러다. 작가는 마지막 걸작 『기나긴 이별』이 나온 뒤 60년이 지난 지금도 독자와 내밀하게 조우한다. 24시간 남과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 '고독'을 이 책이 공급해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