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리뷰/신작, 개봉작, 상영작 추천/줄거리 결말 해석]
개봉일 : 2021.05.12 (한국 기준)
감독 : 헤리 맥퀸
출연 : 콜린 퍼스, 스탠리 투치, 로리 캠벨, 제임스 드레이퍼스
짙게 익은 사랑의 마지막 폭발
슈퍼노바(Super Nova). 초신성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 여행기’다. 젊은 날,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연인과 함께 지내온 세월을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겨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슈퍼노바>의 주인공 샘과 터스커는 동성 연인이다. 개인적으로 동성 연인이 나오는 영화들을 꽤 봤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본 영화들을 되짚어보니 기억 저편에 있는 치기 어린 첫사랑 또는 청춘의 에너지가 묻어있는 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처럼 삶의 끝에 서있는 동성의 연인을 본 기억은 없다는 말이다. 처음엔 이러한 부분이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하고 이걸 개봉일에 바로 보러 갈까? 아니면 반응을 좀 보고 갈까? 고민했더랬다. 아주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이 영화에서 샘과 터스커가 동성 연인이라는 점은 큰 특이점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오랜 시간 서로의 구세주, 연인, 친구로 지내왔다. 주변인들은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또 존중한다. 이질감보다는 푹 익어 진해진 사랑의 단내를 풍기는 열매를 손에 쥐고 지켜보는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샘과 터스커를 연기한 콜린 퍼스와 스탠리 투치의 농익은 연기가 정말 압권이었다. 요즘 들어 큰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본 상영관에선 중반부부터 훌쩍거리는 관객분도 있었다.
<슈퍼노바>를 보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섬세한 음향효과들이었다. 평화로운 대자연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샘이 슬픔을 삼키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들려오던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들. 창 너머로 지나가는 트럭에 흔들리며 달달달 소리를 내는 접시들의 떨림까지.. 꾸밈없이 들려오던 모든 소리들이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매일 조금씩 기억을 잃고, 언젠가는 신체의 기능도 잃어버릴지 모르는 터스커. 그리고 그런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샘. 두 사람은 샘의 연주회를 기회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길에 오른다.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의견은 달랐지만 결국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던 연인의 여행엔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과 변하지 않은 사랑이 공존하고 있다.
샘과 터스커의 머리 위로 광활한 밤하늘이 펼쳐진다. 밤하늘엔 별이 가득하고, 별 보다 더 밝게 빛나던 초신성이 폭발한다. 초신성이 폭발하고 남긴 흔적들은 어딘가에 남아 다른 존재로 합쳐지길 기다린다. 샘과 터스커가 남긴 사랑의 조각들도 언젠가 다시 만나 새로운 사랑의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초신성이 폭발하듯 커다란 빛을 일으키는 순간은 없었지만, 그 잔잔함이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을 안기는 영화였다.
오랜 시간 서로의 구세주이자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최고의 친구로 지내온 ‘샘’과 ‘터스커’. 기억을 잃어가는 ‘터스커’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된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여행이 끝나갈수록, 그들의 감정은 점차 고조되는데…
차마 사라지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 마음의 파편, 그곳에 가장 빛나는 사랑이 있었다.
소설가 터스커와 피아노 연주가 샘은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연인이다. 젊은 나이에 만나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또 언젠가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던 두 사람은 어느덧 중후한 나이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함께 지나온 세월은 행복으로 가득했지만 ‘세월’은 행복이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터스커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기억을 잃고 언젠가는 신체의 기능마저 잃게 되는 병. ‘치매’. 터스커는 무너져내린 자신을 받아들이는 걸 두려워한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시간을 앞당겨 마무리 짓는 건 슬프지만, ‘연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나’라는 존재로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건 또 무슨 의미인가. 터스커는 그렇게 생각한다.
반면에 샘은 어떤 수를 써서든 터스커와의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한다. 터스커가 나를 기억 못해도, 볼펜을 쥐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해도 그를 사랑하고 보살피리라. 우리가 함께 걷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도, 기억을 잃어도 내 사랑은 영원하리라. 샘은 그렇게 생각한다.
샘과 터스커는 여행을 떠나며 ‘지도를 봐야 할지, 내비게이션을 봐야 할지’ 같은 사소한 문제로 투닥거리다가도 썰렁한 농담 하나에 간헐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만난 지 5분 만에 사랑을 고백했던 호수는 이젠 캠핑이 불가능한 호수가 되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여전히 그때와 같다.
저녁을 차려먹고 맞이한 여유로운 밤. 샘은 터스커의 소설을 읽고, 터스커는 샘의 연주를 듣는다. 샘과 터스커는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듣고, 읽고, 마음에 담아가며 함께했다.
흘러간 추억은 아름다웠으나 흘러간 시간의 끝엔 고칠 수 없는 병과 삶의 마침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빽빽하게 차있던 터스커의 노트는 점점 비어갔고, 결국은 찢긴 자국만 남은 채 그대로 덮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숨겨둔 펜토바르비탈이 든 약병. 겉모습만 그대로인 채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터스커는 나를 위해, 연인을 위해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나를 기억나게 해줄 거야. 두려운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샘은 터스커의 결심을 눈치채고, 애써 숨겨왔던 두려움을 드러낸다. 언제나 함께할 것, 연인의 모든 걸 감싸줄 것이라 단언했지만 기억을 잃은 연인을 마주한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일 것이다. 잃기 싫은데, 잃고 싶지 않은데, 막을 수없이 빠르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두 연인은 결정을 내린다.
햇살 가득한 시절이었어. 간혹 비도 내렸지만 아픈 시간은 이제 안녕.
햇살이 가득했던 부드러운 젊은 날, 병을 앓으며 조금은 힘들었던 날들. 샘과 터스커는 이 모든 추억과 사랑, 아픔을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인생의 전부인 연인과 끝까지 함께하기로.
이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샘과 터스커가 함께한 순간, 그들의 귀에 쏟아지는 모든 소리가 아름다웠다. 소리가 좋지 않은 피아노도 샘이 손을 대자 감미로운 연주를 흘려냈다. 어둡기만 했던 밤하늘 같았던 인생에 빛나는 초신성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 그것은 쉼 없이 타오르다 모든 것이 고마운 순간을 품고, 엄청난 빛을 뿜으며 사라진다. 우주에 아주 작은 흔적을 남기고 말이다.
사실상 열린 결말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나는 샘과 터스커가 콘서트를 끝내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을 거라 믿고 싶다. 동반 자살이 아닌, 어떻게든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더불어 마지막 콘서트 장면은 단 한 번도 터스커를 위해 연주해 준 적이 없었던 샘이 처음으로 터스커를 위해 연주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영화에서 터스커가 “별이 폭발하고 떠돌던 분자가 모여 우리가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샘과 터스커의 사랑이 하나의 별, 초신성이라면. 이 사랑이 남긴 분자가 모여 다시 ‘우리’가 될 수 있겠지.
사랑과 인생의 끝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던 연인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그들의 사랑과 상실감을 함께 흡수한 기분이다. 그들의 젊은 날과 첫 만남을 함께하진 못했지만, 지나온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얼마나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지. 샘과 터스커의 말 한마디와 슬픔에 찬 표정을 통해 모두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