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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May 19. 2021

<죽여주는 여자> -'모른 채 하고 싶었던 현실과..'

[영화 후기,리뷰/넷플릭스, 윤여정 영화 추천/결말 해석]

                                    

죽여주는 여자 (The Bacchus Lady)

개봉일 : 2016.10.06

감독 : 이재용

출연 : 윤여정, 전무송, 윤계상, 안아주, 박규채, 조상건


모른 채 하고 싶었던 현실과 삶의 무상함


“박카스 한 병 드실래요?”, “연애하고 가실래요?” 종로의 한 공원, 눈에 띄게 아주 예쁘게 꾸민 노년의 여성이 지나가는 남성들에게 말을 건다. 그녀의 이름은 ‘소영’이다. 6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의 이름이 ‘소영’이라고 하니 괜히 신기하다- 싶었다. 이름부터 스타일까지, 한눈에 보기에도 특이해 보이는 소영은 이 근방에서 ‘죽여주는 여자’로 통한다.


‘별다른 학위나 기술이 없는 노년의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춘뿐이었다.’고 말하는 소영은 평생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어떻게든 돈을 벌고 생을 이어왔다. 사실 의지하지 않은 게 아닌 아무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의 끝자락에서 나는 누군가의 늘어져 버린 욕망과 슬픔, 외로움을 엿보았다.


<죽여주는 여자>의 주인공 ‘소영’역을 맡은 윤여정 배우님의 초연했던 표정이 울먹임으로 바뀌던 순간마다 나약한 노인이 되어버린 그들의 아픔이 뼈마디 속으로 전해지는듯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초반부엔 ‘노인들의 욕망’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부인이 있음에도 공원으로 나돌며 3-4만 원을 지불하고 한 줌의 성욕을 해결하는 노인들의 모습. 그들을 보며 “이건 나이를 먹어도 고칠 수 없는 건가?”싶어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재우와 세비로 송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게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겠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노인들은 이 ‘매춘’이라는 행위를 통해 ‘노인이 되었지만,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받는다.


풍족하지 않은 지갑 사정의 노인들이 지겹게 밀려드는 노년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건, 단돈 몇만원으로 할 수 있는 공원에서의 만남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매춘이라는 행위를 옹호할 의도는 없지만, 그 이면으로 비치던 지독한 외로움으로 절여진 노인들이 모습이 안타까웠다. 삶이 어떤 의미로 느껴지기에 그들은 ‘죽여주는 여자’에게 정말 “죽여달라”고 호소하게 된 걸까.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나간 시간만 몸에 독소처럼 쌓였을 뿐, 남은 것 없는 노년의 무기력함과 슬픔이 스며든다. 더불어 성소수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곱지 못한 시선, 그리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 떠나고 난 자리에 진하게 들어찬 슬픔까지.. 외면하고 싶었던 누군가의 아픔, 잘못된 시선들과 직면할 수 있는 영화였다.




죽여주는 여자 시놉시스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65세의 ‘박카스 할머니’ 소영. 노인들 사이에서는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로 입 소문을 얻으며 박카스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트랜스젠더인 집주인 티나, 장애를 가진 가난한 성인 피규어 작가 도훈, 성병 치료 차 들른 병원에서 만나 무작정 데려온 코피노 소년 민호 등 이웃들과 함께 힘들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한 때 자신의 단골 고객이자, 뇌졸중으로 쓰러진 송노인으로부터 자신을 죽여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다 그를 진짜 '죽여주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은 고객들의 부탁이 이어지고, 소영은 더 깊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임질이죠?” 소영은 이미 자신의 증상을 자각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이 증상을 수도 없이 겪었을지도 모른다. 노인들이 천천히 산책을 즐기고 있는 종로의 한 공원에서 박카스와 소주를 담은 가방을 메고 일거리를 기다리는 소영은 근방에서 ‘죽여주는 여자’로 통한다. 같은 구역에서 매춘 일을 하는 여자들의 시기와 질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받아치는 소영의 모습을 보면 어딘가 드새 보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어쩌다 보니 매춘을 시작하고, 미군부대에 흘러갔다 아이를 낳고, 또다시 홀로 남겨진 소영의 삶.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함께 만든 남자가 누구인지, 힘겹게 낳은 아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후회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왔다. 그런 소영의 눈앞에 나타난 민호는 어릴 적 헤어진 아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좋은 집안에 장가든 한국인 남성과 그에 꼬인 필리핀 여성의 사이에서 난 아들 민호는 아빠에게서 친자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소영과 소영의 아들도 이와 같은 처지였다. 소영은 치킨을 사러 간 가게에서 마주친 미군 병사와 대화를 나눈다.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중,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고?”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어릴 적에 헤어져서 엄마를 알지 못한다고. 답하는 병사의 말에 소영이 멈칫한다. 아마 아들이 생각나서 그랬겠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미군과 홀로 남겨진 소영과 아들. 소영과 미군의 사진, 필리핀 여성과 한국인 의사의 유일한 사진은 신기할 만큼 닮아있다.



소영은 무연고자 노인이다. 남편도 아이도 없다. 공원에서 만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청년에게 한 많았던 인생을 풀어놓던 그녀는 너무 많이 말해버렸다며 이야기를 봉해버린다. 소영이 ‘나의 인생’에 대해 누군가에게 풀어놓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소영과 주변 인물들은 대부분 무연고자 또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노인들이다. 맞춤 정장만 입고 다니던 깔끔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먹는 것도 볼일을 보는 것도,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인이 된 세비로 송, 아들과 부인을 먼저 보낸 후 삶의 희망을 잃은 재우. 그리고 치매에 걸린 종수. 이들은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건지”조차 모르겠다며 소영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세비로 송은 자신이 힘없는 노인이 되었음을, 사회에서 힘을 쓸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잔인하게 재각인 시켜주는듯한 아들네 가족 앞에서 절망을 느끼고, 소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세비로 송은 소영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소영은 세비로 송의 입안에 농약을 부으며 흐느낀다.


깔끔하고 여유 넘치던 신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환자가 되어 천장만 바라보며 죽음을 그리고 있던 시간 동안 가족들은 그를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농약 한 통을 비우고 세비로 송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소영 외에 노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고, 노인의 죽음에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세비로 송은 ‘저녁 약속보다 하찮은 의무’정도였던 걸까.


                                                                       

날 위해 좋은 일을 해주는 거요. 잊지 않으리다.


마음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노인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소영은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노인들의 옆을 지킨다. 왜 죽음을 선택하는지, 왜 죽을 수밖에 없는지 알고 있기에 소영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올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


민호와 민호 엄마의 소송이 해결되면 양육비를 받아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영은 이제야 마음 편히 마지막을 준비한다. 곁을 지켜준 이웃 티나와 도훈과의 소풍을 마친 소영은 교도소에 들어간다. 재우의 죽음에 해명 한번 하지 않고, 그저 추위를 많이 타니 올겨울은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읊조리면서.



소영이 민호와 민호 엄마를 진심을 다해 도운 건 어릴 적 속절없이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속죄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죽고 싶어 하는 노인들을 죽도록 도와준 건 같은 처지의 노인으로서의 동정이었으려나.


소영이 마지막으로 맞이한 겨울은 시리게 추웠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어떻게든 돕고 맞이한 겨울이니 조금은 덜 추웠을까. 평생을 노력했지만 남은 건 하나도 없었던 인생, 결국은 아무도 거두어가지 않아 혼자 걸어야만 했던 그녀의 마지막 걸음이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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