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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May 21. 2021

<찬실이는 복도 많지> - '가득 지고 있던..'

[영화 후기,리뷰/넷플릭스,힐링,한국영화 추천/결말 해석]

                                                                         

찬실이는 복도 많지 (LUCKY CHAN-SIL)

개봉일 : 2020.03.05

감독 : 김초희

출연 : 강말금, 윤여정, 김영민, 윤승아, 배유람


가득 지고 있던 의무감을 내려놓고 꿈을 채울 타이밍


나에게 2020년 최고의 힐링 영화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이 영화라고 답하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뭐 했어?"

"영화했어요."


근 10년 동안 남자를 안아본 적 없는, 올해 40쯤 된 프로듀서 찬실은 할머니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지금껏 영화를 해왔다고.

영화제작이라는 집의 기둥을 담당하고 있지만, 감독의 뒤에 가려져 빛나지 못했던 프로듀서 찬실은 큰 부와 명예를 좇기보단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하고 있음에 만족하며 열심히 일한다. 어느 날 보게 된 '인생 영화' 한편으로부터 시작된 찬실의 꿈은 불혹의 나이까지 흔들림 없이 찬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지감독이 갑자기 꼴깍- 생을 마무리해버린 후, 찬실은 속된 말로 '망했다.'

찬실을 칭찬하던 투자자는 감독이 죽자 바로 찬실을 모르는채하고, 찬실은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높은 언덕 위 하숙집으로 향한다.



꿈을 향해 쉬지 않고 힘차게 달리던 지난 시간을 반강제로 내려놓은 찬실은 시고 떫은 모과 열매를 바라보며 '사회에서의 내 위치'를,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나의 꿈'을 떠올린다.


찬실이 마주한 현실처럼 슬슬 차가워지는 공기가 뺨을 때리지만 찬실은 웃는다. 아니 웃으려 노력한다.

상황이 안 좋다고 하여 마냥 울 수도 없지 않나. 슬퍼도 어쩔 수 없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잠시 꿈을 놓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요란하지 않은, 삼삼한 위로를 전한다. 대놓고 "모두 다 괜찮아!'라고 외치는 것도 아닌데, 왜 찬실의 꿈에, 툭툭 던지는 할머니의 한마디에 위로를 받게 되는 걸까? 무겁게 이고 지고 있던 꿈에 대한 부담감을 한 번쯤은 비워내도 좋다는 담담한 이들의 위로 한마디가 막 끼워둔 새 알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만큼이나 따스하게 다가온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시놉시스


“아 망했다.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집도 없고, 남자도 없고, 갑자기 일마저 똑 끊겨버린 영화 프로듀서 ‘찬실’. 현생은 망했다 싶지만, 친한 배우 ‘소피’네 가사도우미로 취직해 살길을 도모한다. 그런데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이 누나 마음을 설레게 하더니 장국영이라 우기는 비밀스러운 남자까지 등장!

새로 이사 간 집주인 할머니도 정이 넘쳐흐른다. 평생 일복만 터져왔는데, 영화를 그만두니 전에 없던 ‘복’도 들어오는 걸까?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높~은 동네에 위치한 사각형도 반지하도 아닌 애매한 모양의 하숙집에 짐을 바리바리 이고 온 찬실과 후배들이 도착한다. 나름 괜찮은 영화를 만들던 지감독과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프로듀서 찬실. 그녀는 꿈을 꾼다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평생 영화를 만들 줄 알았”지만, 지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꿈을 잃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자리를 잃게 된다. 찬실이 회식자리에서 지감독에게 “감독님 그만해요. 오늘만 하고 죽을 거예요?”라며 장난스레 물어본 게.. 그게 잘못이었을까? 찬실의 영화 인생은 한순간에 꼬여버리고 만다.


내가 원한 것도, 실수한 것도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완전히 자빠져 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 똑 부러진다며 칭찬하던 박대표도 지감독이 없으니 찬실을 찾지 않는다.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찬실은 친한 배우 소피네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오랜만에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 나도 이제 뭐 하는지 모르겠다


주인집 할머니가 찬실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 찬실이 PD였다고 답하자 할머니는 그게 무슨 일이냐 되묻는다. 찬실은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이라 말하고 뒤이어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만든 감독만 기억하지 PD였던 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찬실이 어떤 일을 하며 감독을 도왔는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런 것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찬실은 제철(9~10월)을 넘기고도 한겨울까지 나무에 달려있는, 어쩌면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진 걸지도 모르는 모과 열매를 보며 ‘내하고 닮았나?’하고 혼잣말을 한다.



영화 안 하고도 살수 있겠냐고요


장국영이 찬실에게 묻는다. 영화 안 하고도 살 수 있겠냐고. 찬실은 다시 되묻는다. 내가 다시 영화를 할 수 있겠냐”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나이 40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는데, 감독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게 엎어졌다. 찬실은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지만 내가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찬실은 좁은 방안에 알차게 쌓아놨던 서적들을 정리하며 영화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정리한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뒤늦게 느꼈으니까.


지감독과 함께 일할 땐 몰랐다. 한순간에 ‘선택받지 못한 PD’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업계 내에서 굳어져 버린 이미지로 인해 일거리가 똑 떨어져 버린 상황에서 꿋꿋하게 버텨보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엔 나름의 상처들이 생겼을 것이다.



현실에 지친 찬실이 다음 수거일에 버리겠다며 영화 서적을 내려놓던 날.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손 떼 묻은 책들을 보며 ‘시원하다’는 감정을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찾아주는 사람이 없는 현실과 인생 영화 한 편을 보고 영화계로 뛰어들었던, 꿈에 잠겨있던 과거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지감독의 죽음은 찬실에게 ‘최악의 순간’을 만들어준, 어쩌면 ‘정말 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찬실이는 정말 복이 많은 건지, 영화 일을 잠시 쉬는 동안 그동안 실감하지 못했던, 내가 가진 복과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옷을 얇게 입은 찬실에게 “안 추워?”라고 물어봐 주는 할머니와 소피, 찬실의 일이라면 쪼르르 달려와 도와주는 후배들, 영화 취향도 다르고 결국 연애 대상은 되지 못했지만 찬실을 ‘누나’라고 부르며 따르는 ‘영’. 그리고 찬실의 꿈을 응원해 주는 상상 속 장국영까지. 찬실은 지감독의 부재로 한번 주춤하지만, 다시 자신의 꿈을 찾는다. ‘영화’라는 목표를 향해 걷고 있는 후배들과 소피의 뒤에서 밝은 손전등을 비춰주던 찬실은 이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를 완성한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안고 지고 있으면 뭐해. 버려야 또 채워지지.”


찬실은 최악의 상황에서 여러 현실적인 걱정을 늘어놓음과 동시에 생각한다고 생각되는 게 아니라며 편하게 늘어져있는 소피를 부러워한다. ‘이제 내 꿈은 끝났다.’고 생각할 때쯤 찬실의 앞에 나타난 할머니와 장국영은 찬실에게 반복적으로 묻고, 이야기한다.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영화 없이 살 수 있냐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당신 정말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봐요!”

“우주에서도 응원할게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새로 한글 배우기에 도전하는 할머니,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영,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이것저것 배우며 걱정을 잊고 사는 소피. 그리고 끝없는 응원을 약속하는 장국영.


같은 꿈을 꾸거나 나의 꿈을 응원해 주는 이 모든 사람들이 찬실이가 가진 복이다. 찬실은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복들을 한 가마니 지고 ‘우리가 믿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따라 다시 걷는다. 나이를 가늠할 틈도 없이 쉼 없이 습관적으로 해온 일이 아닌 어릴 적 내가 꿈꿨던 꿈을 향해서.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hkyung769/

블로그 : https://blog.naver.com/hkyung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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