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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Aug 08. 2024

타버린 필름의 마지막 컷.
그 안에 담긴 사랑

영화 <애프터썬> 후기, 해석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캘럼의 상처, 깁스의 의미

- 우리는 알 수 없는 캠코더 밖 캘럼의 모습

- 이루지 못한 노란 희망들

- 포스터에 담긴 의미

애프터썬 (Aftersun, 2023)

타버린 필름의 마지막 컷, 그 안에 담긴 사랑

개봉일 : 2023.02.01.

관람등급 : 12세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01분

감독 : 샬롯 웰스

출연 : 폴 메스칼, 프랭키 코리오, 실리아 롤슨-홀, 루시 파디

개인적인 평점 : 4.5 / 5

쿠키 영상 : 없음


2023년, 나를 제대로 속인 영화 1위. <애프터썬>

<애프터썬>은 표면적으론 아빠와 딸의 여행 기록, 또는 딸의 짧은 성장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이건 온전한 기록이 아닌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이라는 걸 알 수 있고, 조금 더 들여다보면 뿌듯한 성장담이 아닌 누군가의 회한이자 바람, 그리 죄책감이 담긴 이야기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이렇게 아픈 감정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아름답다. 그래서 더 아프고 불안하다. 청량한 여름 하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파도 소리, 귓가를 맴도는 상기된 사람들의 웅성거림, 다정해 보이는 부녀의 모습. 그 아래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아린 감정이 끝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을까, 차라리 모든 걸 모르는 채 영화가 끝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 아래 내용부터 스포 有


오래된 기억과 몇 개의 기록 속으로


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기억을 쌓고 그것을 보관하고 또 가끔씩 꺼내본다. 그런데 이 ‘기억’이란 건 정확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며 잊히기도 하고, 내 바람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순간을 공유한다 해도 기억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추억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는 소피가 찍은 짧은 영상과 함께 시작된다. 20년 전, 튀르키예 여행을 떠난 11살 소녀 소피가 31살의 젊은 아빠 캘럼을 소개하는 영상. 20년이 지나 그때의 아빠 나이와 가까워진 소피는 그 영상을 시작으로 오래전 아빠와의 여행을 되짚어본다.

20년 전에 떠났던 이 여행은 소피와 캘럼의 마지막 여행이다. ‘너무 좋았던 여름휴가’이자 ‘마지막 여행’인 것이다. 캘럼의 죽음과 이유, 시기가 직접적으로 표현되진 않지만 가끔 비치는 지친 표정, 눈물, 난간 위에 올라가거나 바다에 뛰어드는 행동, 의미심장한 말이 적힌 튀르키예 배경의 엽서 같은 것들을 보면 그가 이 여행 이후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의 캘럼과 같은 나이가 된 소피는 왜 그 여행 영상을 다시 꺼내보게 된 걸까? 아빠 생각이 나서,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어서.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큰 건 아마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와 같은 나이였던 아빠, 지금의 나처럼 아이를 키우고 있었던 아빠. 대체 아빠는 무엇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택했는지, 마지막으로 나와 시간을 보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나는 그걸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소피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끝내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처에 대해
캘럼의 상처, 깁스의 의미


여행의 초반부, 아빠 캘럼은 손에 깁스를 하고 있다. 소피는 캘럼에게 다칠 때 아프지 않았냐고 묻고, 캘럼은 다쳤던 순간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한다. 우리는 캘럼이 언제, 어떤 이유로 다쳤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캘럼은 소피가 의자에 앉아 아빠 몰래 잡지를 읽는 동안 차가운 빛의 화장실에 앉아 낑낑대며 홀로 깁스를 풀다 피를 흘린다. 꽤 오랜 시간 다친 부위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깁스는 새로운 상처를 남기고 사라진다.


영화가 끝난 후 위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니, 소피가 20년 전 그 여행으로 돌아가는 건 단단한 깁스를 푸는 일과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는 아빠의 부재로 생긴 상처를 인식하고 있지만 그 위에 시간이라는 깁스를 두르고 아빠와 함께한 순간을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아빠의 나이가 됐을 때, 깁스를 풀 듯 오랜 시간을 넘어 과거를 마주한다. 소피는 영상을 보며 자신이 행복했다는 것과 아빠의 부재가 큰 상처가 됐다는 걸 또 한 번 알게 되지만 그 상처가 생기게 된 근본적인 이유(아빠가 스스로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는 끝내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난 그때의 아빠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새로운 슬픔과 죄책감 가져온다.


만약 칼에 베여 상처가 났다면 왜 칼에 베였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칼을 떨어트렸다거나 잠깐 한눈을 팔다 방향을 잘못 잡았다거나 하는 근본적인 이유. 그런데 소피는 이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빠와 이별해서 슬픈 건 알겠는데 왜 아빠와 이별을 해야만 했는지, 아빠는 왜 이별을 결심했는지를 도저히 알 수 없다. 오래된 상처를 싸고 있던 시간을 뜯어내며 생긴 이 새로운 상처들은 소피를 슬프게 만든다.

그때 아빠는 어땠을까
우리는 알 수 없는 캠코더 밖 캘럼의 모습


<애프터썬>은 소피의 기억과 캠코더 안에 담긴 몇 조각의 기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캠코더 안에 담긴 영상마저도 그 당시의 어린 소피의 시선으로 기록한 것들이다. 소피가 찍은 영상 속의 캘럼은 벽에 가로막혀 있거나 키 차이로 인해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캘럼이 눈물을 흘리거나 바다로 뛰어드는 등 위태로운 모습들을 보여주지만 그게 진짜인지 소피가 뒤늦게 상상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실제론 캘럼이 여행 내내 소피에게 슬픔을 전혀 티 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새로운 경험에 신난 어린 소피의 눈엔 캘럼의 우울함이 보이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후자보단 전자에 가까운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리 즐거운 상태라 해도 부모가 우울하거나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도 바로 눈치를 챈다. 하지만 부모가 단단히 마음먹고 숨긴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캘럼이 우는 장면,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 난간에 올라선 장면 모두 소피와 함께 있지 않기에, 이것들은 소피가 나중에 ‘아빠가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며 짐작, 상상하며 만들어진 장면일 가능성도 있다.


거대한 우울감을 저 밑에 숨기고 웃는 얼굴로 딸을 마주하던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마지막으로 딸을 배웅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딸에게 줄 카펫을 고를 땐, 사랑을 적은 엽서를 보낼 땐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루지 못한 노란 희망들


어린 소피는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중에 어떤 것은 이루어진걸로 보이고 또 어떤 것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걸로 보이는데, 영화 속에선 그것들을 통틀어 노란색으로 표현한다.

두 부녀가 런던에서 살며 함께 꾸미기로 했던 노란 방, 캘럼과 소피가 서로의 모습을 찍었던 노란 필름 카메라, 어른 같아서 부러웠던 언니가 준 음료수 바 팔찌, 무대 위 노란색 옷을 입은 직원들 등.

노란 방은 캘럼의 죽음과 함께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고, 노란 필름 카메라는 그것이 실존했는지, 그 순간의 사진이 제대로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소피는 노란색 옷을 입고 무대 위에 서있는 직원들처럼 캘럼과 함께 무대에 서고 싶었지만 캘럼이 그를 거부해 홀로 무대에 선다. 그나마 음료수 바 팔찌는 소피의 손목에 감아지긴 했지만 소피가 ‘아빠와 함께’ 하고 싶었던 것들은 이루어지지도, 제대로 된 기록도 남지 않았다.

끝이 타버린 필름 한 통
포스터에 담긴 의미


이건 (우측과 좌측 모서리가 붉은빛으로 되어있는) 메인포스터를 보면서 든 생각인데 이 이야기는 마치 끝이 타버린 필름 같다.

필름 카메라는 필름의 정해진 컷 수를 모두 찍은 후 필름을 꺼내 약품 처리를 하는데 약품 처리를 하기 전까진 필름이 빛에 노출되는 걸 막아야 한다. 그래서 완전한 암실에서 필름을 꺼내거나 밖으로 나와있는 필름을 반대편으로 끝까지 감아 처음에 들어있던 케이스 안으로 넣은 후 필름을 꺼내야 한다. 그런데 필름을 반대편으로 끝까지 감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빼게 되면 케이스 밖으로 삐져나온 필름의 일부가 빛에 노출되고 그 결과로 사진의 일부분이 손상되거나 그 위에 빨갛게 탄 자국이 생기는 ‘번 현상’이 나타난다.


<애프터썬>에 담긴 캘럼과 소피의 추억은 마치 이러한 이유로 마지막 컷이 타버린 필름 같다.

아빠와의 추억이 한 통의 필름이라면 20년 전 튀르키예 여행의 추억은 마지막 36번째 컷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여행의 추억은 이별이라는 슬픈 사건으로 마무리되었고 필름을 덜 감고 서둘러 제거하는 것처럼 그 추억을 서둘러 잊어버리는 바람에 마지막 36번째 컷인 추억의 일부가 온전하지 않은 채로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아빠의 나이가 된 소피는 다시 복구할 수도 새로운 컷을 찍을 수도 없는 끝나버린 추억의 필름을 되감는다.


온전하지 않은 추억의 끝에 담긴 캘럼이 소피에게 사랑을 표현했던 순간, 소피가 다른 생각 없이 단순하게 캘럼을 사랑했던 순간, 언뜻 비치는 불안했던 순간. 이 모든 순간들은 나에게 오래도록 풀리지 않을 감정의 타래를 남겼다. 아마 나는 평생 캘럼의 마음을, 남겨진 소피의 마음을 모른 채 살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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