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뢰한> 리뷰, 후기, 해석 / 한국 느와르 로맨스 영화
개봉일 : 2015.05.27.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드라마, 범죄, 멜로, 느와르
러닝타임 : 118분
감독 : 오승욱
출연 :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곽도원, 김민재, 박지환, 최영도, 하지은, 강태영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사랑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이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 중요한 믿음이 없다. 아니 믿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단 그것을 방해하는 잡다한 것들이 너무 많다.
<무뢰한>은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된 형사 재곤이 살인범 준길을 쫓다 찾게 된 그의 애인 혜경에게 접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형사와 용의자 or 용의자 애인의 로맨스라.. 최근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두 영화는 결이 좀 다르다.
<헤어질 결심>이 사랑에 잠겨가는 과정을 섬세하고 텐션 있게 그려낸 영화였다면 <무뢰한>은 사랑을 품고 내치는 반복 과정 속에서 생긴 상처를 보여주는, 날것의 비릿한 향이 물씬 풍기는 영화다.
예리함과 무례함. 거짓과 진실.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사랑은 찢기다 못해 너덜거리면서도 처절하게 소리친다.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형사인 재곤은 흔적 없이 사라진 살인범 준길을 잡기 위해 준길의 유일한 측근이자 애인인 혜경을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혜경이 일하고 있는 단란 주점의 영업 상무로 들어가 천천히, 꾸준하게 그녀를 관찰한다. 살인범의 애인인 술집 여자라.. 형사로서는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여자다.
그런데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일까. 재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모른척하며 준길을 체포하기 위해 혜경의 곁에 머무르는 게 맞다 합리화하고 혜경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는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합리화한다.
혜경은 준길의 애인이지만 그와 동등한 위치에 있진 않다. 혜경은 항상 준길을 기다렸고 준길을 위해 모든 걸 내줬다. 불을 끄라고 하면 불을 껐고 돈이 필요하다 하면 돈을 모아다 줬고 언제, 어떻게 올진 몰라도 기다리라 하면 기다렸다.
너무도 불리하고 남는 것 하나 없는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혜경은 준길을 사랑한다. 진실한 사랑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녀는 인생에서 사랑하고 믿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준길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혜경은 준길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은 눈물과 외로움을 껴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원래라면 외로움이 들어차야 할 자리에 재곤이 등을 비비며 눕는다. 혜경은 뻔뻔하게 자리를 꿰찬 그를 경계하다가 이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안 그럴 것같지만 사실 누구보다 순수하고 외롭게 사랑을 이어가는 혜경과 누구보다 진솔해야 하지만 무엇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만 늘어놓는 무뢰한 재곤. 형사와 용의자의 애인이라는, 시작부터 꼬여버린 두 사람의 로맨스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진심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관계
재곤과 준길은 혜경을 사랑한다. 혜경은 재곤과 준길을 사랑한다. 재곤은 혜경을 위해 동료인 기범에게 등을 지고 준길은 혜경을 지키려고 황충남을 죽인다. 하지만 이 두 남자는 진심을 쉽게 보이지 못하거나 끝까지 부정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인생에서 사랑은 곧 약점이 되고 약점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기에 이들은 어둠을 이용해 진심과 약점을 모두 숨긴다.
준길은 살인을 저지른 밤, 바닥을 찍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불을 켜지 않은 채 혜경과 사랑을 나누고 경찰에 쫓기게 된 이후론 주로 어두운 밤에 혜경을 찾아온다. 혜경은 재곤 앞에서 업계에서 자신의 위치가 바닥이라는 사실을 들킨 후 주점으로 돌아와 불을 반만 켠 룸에서 홀로 술을 먹는다. 재곤은 해가 뜨기 전, 혜경의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들은 어두컴컴한 공간에서만 사랑을 나누거나 아주 잠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뿐, 모두가 볼 수 있는 밝은 곳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가다듬고 결코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버려지고 남겨진 혜경의 마음
혜경이 재곤, 준길을 위해 차린 음식의 의미
혜경은 준길과 재곤의 거짓 같은 사랑이라도 믿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열심히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의 고백법은 바로 요리다.
혜경은 자신의 집을 찾아올 준길을 위해 저녁밥을 준비한다. 그러다 준길이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 싱크대에 올려둔 음식들을 전부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런데 이후 준길이 집에 찾아오고 혜경은 왜 못 온다고 했냐며 준길을 구박하다 “자고 갈 거지? 내가 해주는 아침 먹고 가야 돼.”라며 애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준길은 혜경이 준비해둔 저녁, 그녀가 준비하려 했던 아침을 모두 먹지 않고 다시 자취를 감춘다.
혜경이 준길을 위해 준비해둔 음식과 그녀가 그 음식을 모두 버리는 모습. 그리고 준길에게 아침을 먹고 가라며 속삭이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까지. 혜경의 집에 도청기를 달고 잠복을 하던 재곤은 이 과정을 모두 보고 듣는다. 애정이 배제된 편의점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그리고 시간이 지나 혜경이 재곤에게 마음을 열고 재곤 또한 혜경에게 애정을 느끼게 됐을 때. 혜경은 자신의 집 앞에 찾아온 재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냉장고를 뒤지며 “다음에 맛있는 거 해줄게요.”라는 약속을 하고 해가 뜬 후 혼자 전화를 하러 나가는 재곤에게 “가지 말아요. 맛있는 거 해줄게요.”라고 말한다.
재곤이 방으로 돌아와 다시 몸을 눕히고 있는 동안 혜경은 재곤을 위한 아침을 준비한다. 재곤은 혜경이 건네는 애정이 들어간 음식을 한 입 먹고 넌지시 진심 어린 말을 던진다.
“준길이 돈 줘서 보내버리고 나랑 같이 살면 안 될까?”
재곤과 혜경의 눈빛이 흔들린다. 불신, 사랑, 믿음 등 온갖 감정들이 뒤섞이는 순간이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재곤은 이내 그 말을 믿냐며 진심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얼마 먹지 않은 음식과 혜경을 남겨둔 채 자리를 뜬다.
이번에도 혜경의 음식은 남겨지고 버려진다. 그녀의 마음도 항상 남겨지고 버려진다. 재곤의 마음이 거짓이라도 믿고 싶었던 마음, 준길을 끝까지 믿었던 마음. 그 마음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진다.
혜경은 재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은 여기(빚을 잔뜩 지고 있는 유흥 업계)서 도망치면 보통 사람처럼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확신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나는 요리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혜경에게 요리를 하는 건 곧 사랑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녀는 열심히 돈을 벌어 준길의 빚을 갚고 이 바닥을 뜨면 사랑하는 그와 보통 사람처럼 잘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녀는 재곤과 아침을 먹으며 약간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이젠 이 집을 빼고 준길을 따라갈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준길은 끝까지 혜경에게 돈을 요구했을 뿐, 그녀를 유흥 업계에서 꺼내주지 못하고 죽는다.
재곤 또한 혜경을 구해주진 못한다. 재곤은 혜경에게 준길에게 줄 돈을 건네주었지만 그건 재곤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준길을 체포하기 위한 미끼에 가까웠다. 그리고 애초에 형사인 재곤은 범죄자의 애인인 혜경을 구해줄 만한 관계가 아니기도 했다.
혜경은 그렇게 버려지고 남겨지고 또 속으며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다. 혜경은 진심을 주려 노력했지만 두 남자와 그 주변인들은 그녀의 진심을 너무도 무례하게 이용하고 버린다.
혜경이 내린 벌을 받아들인 재곤
재곤이 혜경의 칼을 그대로 맞은 이유 / 엔딩, 결말, 무뢰한 뜻 해석
준길이 죽은 후 재곤은 다른 일을 시작한다. 그는 연인을 폭행한 남자 김형석을 체포하는데 김형석은 형사들에게 억울하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난 사랑을 한 겁니다. 사랑을.”
재곤은 김형석을 지나쳐 피해자 민지에게 향한다. 민지의 얼굴과 손목엔 김형석이 사랑이라고 주장한 것의 흔적인 상처와 흉터가 가득하다. 재곤은 피를 흘리며 벌벌 떨고 있는 민지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준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자신의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혜경을 떠올린다. 애초에 재곤이 혜경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재곤이 혜경에게 사랑 비슷한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혜경 또한 지금처럼 상처 입지 않았을 텐데. 재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혜경을 찾는다.
혜경의 거처를 찾아가 소탕작전을 벌이던 재곤은 혜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난 내 일을 한 거지. 널 배신한 게 아니야.”
혜경은 칼을 든 채 끝까지 무뢰한 남자, 재곤의 뒤를 쫓아간다. 그런데 재곤은 혜경을 그대로 감싸 안는다. 그는 이제야 뭔가 좀 풀리는 것 같다는 표정으로 혜경을 안고 다른 형사들을 돌려보낸다. 그리고 천천히 혜경에게서 멀어진다. 사랑을 이용한 무뢰한 재곤은 그렇게 상처받은 혜경이 내리는 벌을 받아들인다.
끈적하고 집요하게 파내려 간 감정의 바닥에서 마주한 건 신기하게도 꽁꽁 숨겨둔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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