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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Oct 01. 2020

<맨 프럼 어스> -
'항상 존재하던 진실과..'

[영화 후기,리뷰/넷플릭스, 왓챠, SF 영화, 명작 추천/결말 해석]

                                                                            

맨 프럼 어스 (The Man From Earth)

개봉일 : 2015.08.23. (한국 기준)

감독 : 리처드 쉔크만

출연 : 존 빌링슬리, 엘렌 크로포드, 윌리엄 캇, 애니카 피터슨, 리차드 리엘, 데이빗 리 스미스, 알렉시스 소프, 토니 토드


항상 존재하던 진실과 믿음의 간격


환상적인 비주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 ‘SF 영화’라 하면 기본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조건들이 있다. <맨 프럼 어스>도 SF 영화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SF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 영화의 배경은 ‘존’이라는 인물의 집안에서만 진행된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온 외계인 도민준의 집처럼 멋지고 세련된 집도 아니다. 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단층집, 세월이 묻은 벽지와 바닥,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낡은 가구들. 이사를 앞둔 존의 집안에 남아있는 건 소파와 침대 같은 큰 가구 몇 개뿐이다. 존의 동료 교수들은 갑작스럽게 퇴임 의사를 밝힌 존을 배웅하기 위해 그의 집에 모이고, 그날 밤 그들은 지금까지 알던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고고학자, 심리학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 인류학자까지. 자신의 분야 내에서 학자 타이틀을 따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어떤 말을 하든 흔들리지 않을듯했던 교수들은 여러 질문에 자연스레 답하는 존의 모습에 당황함과 동시에 호기심을 느낀다. 그들은 “내 상식 밖이야”라는 말을 반복하고, 존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맨 프럼 어스>는 80여 분의 러닝타임을 좁은 거실에서 펼쳐지는 존의 경험담(또는 거짓말?)으로 가득 채운다. 영화를 보기 전엔 왠지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할 만큼, 이 영화는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존’이 풀어나가는 14,000년의 삶은 크게 격동적이지도, 신화와 같은 경험도 없지만, 매혹적인 호기심의 향을 내뿜고 있다.




맨 프럼 어스 시놉시스


10년간 지방의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중에 종신교수직도 거절하고 돌연 이사를 가려는 존 올드맨은 그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동료들이 마련한 환송회에서 갑자기 폭탄선언을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자신이 14,000년 전부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 맨 처음엔 그저 농담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게임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존이 논리 정연 답변을 척척해나가면서 각 분야 전문가인 동료 교수들은 그의 주장에 점차 신빙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10년간의 교수 생활, 곧 학과장을 앞둔 교수 ‘존 올드맨’이 갑자기 사직을 결정한다. 동료 교수들은 존의 마지막을 함께 배웅하기 위해 그의 집에 모인다. 차 트렁크에 모두 실을 수 있을 만큼 적은 짐, 이미 텅 비어버린 낡은 집안. 성대한 마지막 배웅 파티가 아닌 조촐하게 소파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지만, 존과 교수들은 나름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존의 마지막 저녁을 함께한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 태어난 인간이 아직 살아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댄은 존의 거실에서 부싯돌과 같은 앵무새 부리 새기개를 발견한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물건,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구석기 시대의 인류로 흘러간다. 존은 동료들에게 크로마뇽인이 살아있으면 어떨지 물은 후, 자신이 그 크로마뇽인이라는 것을 밝힌다. 당연한 반응이지만, 동료 교수들은 그가 농담을 하거나, 취한 거라고 생각한다. 양주를 흠뻑 마신 후 ‘가상의 원시인’을 만들어 소설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존은 웃으며 소설을 집필할 거냐 묻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처음 1,000년은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고, 2,000년은 너무도 추운 시기였고, 그 후엔 자신의 존재가 ‘저주’인 건 아닐지 고민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존은 계속해서 살아남았고, 점점 커지는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살아간다. 평평한 땅에 건물이 들어서고, 나라 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동한다.


                                                                        

진실한 모습으로 인사하고 싶었어


존은 35세의 모습에 멈춘 채 늙지 않는다. 더 이상 바뀌지도, 그렇다고 죽지도 않는 삶. 동료 교수들에게 그는 ‘존 올드맨’이라는 10년 차 교수지만, 존이 생각하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14,000년을 살아온 ‘존’이다.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 하지만 평범한 인간들의 현실을 함께하고 있는 존재인 존은 다른 이들이 상상하는 만큼 초월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흔히 14,000년을 살았다고 말하면 엄청난 부, 창고에 가득 찬 유물(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한 전리품), 전지전능한 능력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존은 다르다. 동료 교수들은 오랜 시간 살아온 그에게 또 다른 유물, 사용하던 물건이 없냐고 묻는다. 존은 ‘새로운 시작’, ‘새로운 인생’이라는 시작점의 의미가 모호해진 삶에서 물건은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인생에 초연해진 존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의 집안엔 진귀한 물건도, 값비싼 가구도 없다.


                                                                        

자네 이야기는 우리 상식에 어긋나


140년도 못 믿을 판에 14,000년을 살아남은 인류, 거기에 더해 ‘예수’의 존재까지 언급하다니. 내로라하는 지식인인 교수들에게 존의 이야기는 ‘상식’의 선을 넘은 것이었다. 존은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 외에는 자신의 인생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었고, 동료들은 그의 이야기를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이 이야기의 끝은 딱 두 갈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존이 동료들을 믿게 하거나, 동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존을 현실로 끌어내거나.



존은 동료 교수들의 물음에 답하며 자신이 신화와 성경에 나오는 ‘예수’였다는 마지막 폭탄선언을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디스는 ‘신성 모독’이라며 열을 낸다. 존은 부처를 만났고, 부처의 말을 전하러 바다를 건넜다가 ‘예수’라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높이 떠있는 별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기대하는 존재, 어디에나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의 존재, 인류가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환을 책임지는 존재인 ‘신’말이다.



이디스는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의 존재를 언급하는 존을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며칠 전 아내를 잃은 윌은 죽지 않는 ‘존’에게 옅은 분노를 느낀다. 모두가 죽지만 혼자 죽지 않는 존재.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안고 가겠지만, 결국엔 살아남는 존재. 두 사람은 본인의 상식과 마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존에게 적대감을 느끼다가도, 동료 교수들의 중재에 의해 그의 이야기에 다시 집중하게 된다.



우리의 상식과 믿음은 잘못된 것일까?


동료 교수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와 존이 말하는 ‘진짜 예수의 삶’ 사이의 거리감과 괴리감에 혼란스러워한다. 이디스는 중세 시대의 사람들을 ‘씻지도 않는 원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씻지 않는 원시인’을 만든 건 중세 시대 교회의 “하나님의 티끌을 씻는건 죄"라는 가르침이었다. 해리와 댄은 신이 초월적인 인물일 거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크로마뇽인(원시인)이었던 존'이었다.


                                                                        

독실함은 가르침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인 거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없었다. 그는 잠시 죽은 척 연기를 했던 것이고, 피와 못은 종교적 예술성을 위해 첨가된 허구였다. 성직자들은 사람들을 겁주고, '신'의 존재를 믿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존이 전하려고 한 이야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가르치려 했던 것을 믿으라. 그뿐이었다.


                                                                       

난 항상 존으로 소개했어


존은 긴 삶을 살아오며 성을 바꿨을 뿐, 항상 '존'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는 크로마뇽인이 되기도, 인류학, 고고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기도 했고, 예수의 존재가 되기도 했다. 예수의 탄생은 진실임과 동시에 허구와 동화였다. 동화 속 이야기가 교회를 만들었고, 존은 누군가를 살리거나 물 위를 걸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존'을, '예수'를 어떤 존재라고 믿을 것인가? 존은 자신의 존재를 직접 판단하라고 말한다. 예수의 존재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것인가, 반대로 사실이라 해도 믿을 것인가?


                                                                       

믿든 말든 늘 존이었어


꼬리에 꼬리를 문 이야기는 결국 존의 "다 지어낸 얘기예요."라는 말 한마디에 막을 내린다. 교수들은 내심 안도하는 모습으로 존의 집을 나선다. 그리고 뒤늦게 집을 나서던 윌은 존에게서 익숙한 이름을 듣게 된다. 어머니와 어릴적 키우던 강아지의 이름, 그리고 어머니가 일했던 학교의 이름. 말로만 전해 들었던 '아버지'의 이름. 생애 처음으로 만난 아버지의 젊은 모습. 존의 삶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심장이 좋지 않던 윌은 그 자리에서 쇼크로 사망하고 존은 샌디와 함께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존은 샌디와 '가능한 만큼'사랑을 나누고, 또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날 것이다. 점점 넓어지는 세상에 적응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미래를 살아가진 못하지만,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맨 프럼 어스>의 주인공 존은 자신이 14,000여 년을 살아온 인류이자 예수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진짜 예수'는 전능하지도, 자비가 넘치는 창조주도 아니었다. 모든 건 만들어낸 허구와 동화인 걸까? 딱 잘라 말할 순 없는 문제다. 개인적으론 '믿는 건 자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믿음을 중심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다른 문제들을 외면하려 한다면 그건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죄'와 같은 것이다. 꾸며진 믿음과 두려움만을 바라보지 말라, 존이 말했듯이 그가 가르치려 했던 것에 집중하라.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hkyung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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