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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 외,『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리뷰

by 이희연

221202 작성 完


피에르 부르디외, 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리뷰

<Uninvited, Comforted>

1. 들어가며 : "하나의 유령 - 대륙철학이라는 유령이, 사회학 이론에 떠돌고 있다."


맑스, 뒤르켐, 베버에서부터, 그 위로는 데카르트까지. 아래로 사회이론의 하버마스, 부르디외,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투르. 그 계보 속에서 A의 아도르노, 알튀세르, 아감벤부터 Z의 지젝까지. 비단 이들 뿐이겠는가. 사회학 혹은 사회이론의 영역에서 누군가의 저서나 해설서를 읽으려 들면, 이들의 이름을 절대 피해갈 수 없다. 누구 한 명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필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 조차도 될 수 없는 것이 된다.

결국 현대로의 이행은 어느 독립적인 누군가 한 명의 세계관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된 이름들 모두의 지성사가 치밀하게 직조되어 사상/이론 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인데, 그럴수록 나로 하여금 지식의 파도 속에서 부표를 띄워도 이것이 바닥에 고정되지 않아 영원히 부유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아마 나는 이 유령 때문에 끝까지 올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2. “기능주의적 함의”의 포착 시도 – 그는 오해를 소명하고 싶다.


이 책을 세 번 읽어도, 부르디외의 말에서는 기능주의적 혐의를 찾기 어려웠다. 당연한 것이다.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이하 ‘텍스트’) 말미에 역자는 “이 책은 부르디외가 스스로가 어떻게 읽히고 싶은지 변명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부르디외에게서 비판의 지점을 찾는 것은 부르디외가 스스로를 변명/변증 하는 지점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을 수차례에 걸친 독해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바캉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리 부르디외 스스로가 “‘비판사회학’이라는 꼬리표를 거부(텍스트, 315쪽)”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위치를 비판사회학에 레이블 하기에 생각해 보자면, 그런 그에게 있어서 기능주의적 혐의가 많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그의 저술활동의 시작은 레비-스트로스적인 구조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이었고(기능적 분화와 사회적 불평등, 정선기, 112쪽), 텍스트에서는 탈컷 파슨스를 강도 높고 원색적으로 비판한 만큼, 그에게서 기능주의적인 함의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텍스트가 ‘부르디외의 변명집’인 만큼, 부르디외에게서 기능주의적 혐의는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 없고, 본인의 미진한 역량으로 인해 그것을 온전히 포착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를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 외부 텍스트 몇몇을 활용하였다.

“당신의 모델은 지나치게 정적이며 ‘폐쇄적’이어서 저항이나(텍스트, 315쪽) 변화, 역사의 난입을 고려할 여지를 거의 남겨 두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텍스트, 149쪽)” 물론, 바캉은 부르디외가 이런 지적에 대한 부분적인 반박을 하였다고 했으며, 부르디외는 본인에 대한 비판을 ‘오독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하며 본인에 대한 비판을 일축했다.

‘폐쇄적’이라는 지점을 보았을 때 연상되는 개념이 있었다. 루만의 계(System)이었다. 즉, 바캉이 언급한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생기는 난점이 부르디외의 이론 체계가 폐쇄계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 체계는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므로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저항, 변화, 역사의 난입을 고려할 여지를 거의 남겨 두지 않는 또 다른 “계”적 성격을 가진 사회 체계 이론으로는 단연 ‘탈컷 파슨스’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AGIL 도식의 특징으로는 굉장히 역동적이라는 것에 있다. 사회 각 조직 내에서 ‘적응 – 성취 – 통합 – 유지’가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양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AGIL이 행해지는 내부에서 다시 AGIL로, 무한히, 프랙탈의 구조로 소우주를 형성한다는 차원에서 유기체적 성격이 보이기도 한다. 이는 모든 행위 자체가 AGIL의 조각 중 하나이거나 AGIL의 내부에 편입된다는 점에서 저항이 불가능해 보이는 난점이 있다.

다시 부르디외로 돌아와, 구조주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그 논지를 전개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 처럼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부르디외는, “사회구조를 오로지 행위자의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정선기, 115쪽)”

부르디외는 ‘장’의 개념을 이용해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분화된 사회적 장들을 전체 사회, 즉 ‘대우주’ 내에 위치하는 ‘소우주’로 표현한다. 특히 장과 그 하위 장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전체 사회는 다수의 하위 장들로 구성되는 포괄적인 사회적 장이고, 이는 빈번하게 ‘공간’(Raum)의 개념으로 표현된다.(정선기, 118쪽)”

“사회적 공간의 분화된 장을 관찰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것을 분화의 정도에 따라 미분화된, 조금 분화된 사회적 구성물, 고도로 분화된 사회적 통일체 등으로 구분한다.”(정선기, 119쪽)


이 구도를 보면, 대우주가 있고, 그 속에 소우주가 존재하고, 그 안은 다시 소우주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구도로 보인다. 다시 이야기하면, 대문자 사회 안에, 소문자 사회가 형성되고, 그 소문자 사회는 다시 자기만의 대문자 사회가 되어, 그 내부에 소문자 사회를 두는 이런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설명한 AGIL이 작동하는 도식과 굉장히 유사성을 띤다.

이런 차원에서 부르디외의 구도를 보다 보면 어떤 행동이든, 어떤 형태에서의 저항의 장이든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속의 구성요소일 뿐이다라는 정서를 준다. 사회 바깥의 것을 상상할 수 없게끔 하고, 어떤 안티테제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을 포섭하는 모습은 가히 파슨스의 사이버네틱스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부르디외는 본인에 대한 오독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각각의 장들에서 적용되는 다양한 기능적 규칙에 대해서 언급하며, 개별 장들이 통일적인 기능으로 전문화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특정한 갈등이나 경쟁상황의 의도하지 않은 수반 현상이며, 실제 사회적 장은 기능에 대한 명백한 설정 없이 수많은 과제를 넘겨받는 것이다. 그는 기능 개념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지만 매우 소극적으로 사용하며, 자신의 장이론을 기존의 유기체 모델이나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본다.(정선기, 120쪽)”


부르디외의 말이 인용된 위 인용문은 부르디외 본인에게 기능적 함의가 완전히 없지 않음을 시사한다. 부르디외가 베버적 전통에서 사회의 분화를 바라본 경향이 있으나, “통일적인 기능으로 전문화” 말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면, 사회 각 조직이 조직별로 기능하여, 대문자 사회(혹은 대우주)를 떠받들거나 그를 구성하는 유기체적인 모습으로 보일 여지 역시 다분하다.

결국 다시 본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와서, “기능주의적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있어서, 소쉬르의 아이디어를 한 번 더 끌고 와야 하겠다. 우리의 사고의 틀은 어휘가 제공해 주는 pool 이외의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이제는 자명하다. 우리가 파슨스를 어떻게 대우하든, 현대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pool의 상당수를 파슨스가 정리했고, 사회학이라는 ‘계’속에서 우리는 파슨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파슨스의 언어는 뒤르켐, 맑스, 베버, 그리고 고전 학자들이 빌려온 철학자들 – 예컨대 헤겔이 그 예가 될 것이다 – 의 약간의 편취는 있더라도 모두 구성요소화하고 있기에, 우리는 파슨스의 언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 이론의 큰 이론적 축인 ‘구조’와 ‘주체’로 다시 회귀하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부르디외는 구조주의를 비판해 왔다. 탈컷 파슨스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이며, “나는 기구 개념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내게 그것은 ‘비관론적 기능주의’의 트로이의 목마나 마찬가지이다.(텍스트, 181쪽)” 라고 한 것 처럼 알튀세르의 이론도 비판한 맥락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 혹은 체계 역시 무언가 Social Structure의 구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장이라는 개념은 사회과학의 진정한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연구 절차의 일차적인 초점이 되어야 하는 일차적인 것은 장이다. 이는 개인이 단순한 ‘허상’이며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다. 개인은 - 생물학적 개인, 행위 주체, 또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 행위자로서 존재한다.(텍스트, 188쪽)”


구조라는 것은 이제 어떤 학자들에게서 그 혐의가 엿보일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 부르디외에게서 주체의 자리는 얼핏 보면 없는 듯 보인다. (부르디외를 편취하고 오독하자면) 장 위에서 자본을 등에 업고 아비투스를 손에 쥔 장기 말이 주체라면, 기능주의적 혐의가 문제가 아니고, 주체의 행위, 그리고 저항의 문제는 또 어디에 놓이는지 계속해서 의문이 들 따름이다. 상호작용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것 이외에는 주체는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든다.

동시에 이런 상호작용의 각각의 관계를 모아 직조하여 네트워크로 만들고, 메조 스케일로 이를 격상시키고, 이런 네트워크를 모아 거대 이론이 되는 과정에서 주체의 향기는 사라지고 만다. 마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입자는 관측되지 않지만 파동은 관측되는 것처럼. 주체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맥락 적으로 앓겠으나, 우리는 거대 사회 체계이론의 늪 속에서 손을 넣어 주체를 손을 꺼내 끌어올리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덩어리로 된 주체를 끌어올린 적이 없다. 어떤 촘촘한 체를 가져와도 우리는 주체를 걸러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3. An Invitation to Reflexive Sociology, Not Invited.


사회학을 공부할수록, 매끄럽지 않은 지점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인문학 전체에서 자리하는 곳이 어디인지였다. 부르디외가 “학생들을 가르칠 필요에서 나온 그러한 절충 주의적 편집, 분류를 위한 편집은 교육용으로는 좋지만, 그 밖의 다른 목적에는 별 쓸모가 없다.(텍스트, 359쪽)” 라고 말한 지점에서, 학문들을 좌표평면 위에 놓고 '철학은 어디, 사회학은 어디, 정치학은 어디, 경제학은 어디…' 이런 식으로 단순 도식화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 것 같지만 아직 나는 이런 장난이 하고 싶었다.

이런 의문을 가진 이유는, 나름 순수 학문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며 대학생활을 하고 전공 공부를 해 나가고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갈수록 사회학 고유의 영역이 부재하다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나는 사회학에게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예언자”의 역할을 하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요. 서론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대륙철학자들의 이름을 위키피디아에 검색하면 분류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대륙철학자일 것이고, 그 다음 몇 가지 범주가 나올 것이고, 그 목록의 마지막에야 사회학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실망함을 금치 못한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가라타니 고진' 전집 완독을 목표삼아 읽은 적이 있었다. 목표한 대로 모두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트랜스크리틱’은 칸트와 맑스의 접합 시도에 관한 저서였다. 이런 식으로 철학은 사회학의 뿌리인 맑스에서 빌려오고, 현대 사회학은 철학이나 과학의 아이디어를 빌려온다. 이런 예시들을 볼 때 마다, 앞서 가졌던 질문인, ‘사회학이 어디에 있는가’는 커지기만 했고, 이는 ‘사회학’이라는 용어와 그 용어가 부여하는 체계에 대한 의문을 갖게끔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런 쓸모없는 질문을 하는 이유가, 사회학을 잘 모르고 있거나 사회학을 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인가 하는 지점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사회학은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회에서 정동하고 있는 지점을 포착하고 조명하여, 더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한 질문을 하는 것. 그것이 사회학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에 대한 대답까지 찾아내는 것.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예언자”의 역할을 하길 바라는 것.

지금보다 더욱 치기 어렸던 시절, 혁명에 대한 모든 지식은 몇몇 전해들은 이야기와 '몽상가들'에 지나가는 몇몇 장면들과, 우리네 80년대를 다룬 영화들과, 몇몇 투사들에 대한 편린들. 그리고 체 게바라.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실천들이 있어야 한다고 느슨하게 믿고 있었다.

사회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느슨한 믿음 탓인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의문이, 단순 의문에서 확신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이렇게 가르쳐 주시곤 한다. 위대한 선배 이론가들의 해답에 매몰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던진 질문을 재조명하여 오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 확신은 점점 더 굳어져만 가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사회학에서만 하는 일이 아니긴 하지만, 기존에 우리가 정전이며 전통이라고 믿어온 것을 고작 몇 가지 질문만으로 그 위상을 격하시켜버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을 파괴시키기만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망치로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면 무엇이 남을까. '무'가 남는다고 하는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는 것은 아닐 텐데. 다시 쌓아 올려도 어차피 누군가는 다시 또 박살내어 버릴 것, 왜 쌓아야 할까 라는 의문이 들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이제는 철학과 사회학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철학과 사회학이 어디에서부터 분화되었고 무엇이 달라졌으며, 어느 시점에서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느냐 라고 물으면 나는 수이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지성사의 계보를 추적하다 느낀 막연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지점은 비단 나만이 느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양한 사회과학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당해 있는 철학에 남겨진 특수한 임무, 의미 있는 인식론적 공간이 있는가? 사회학은 학문의 여왕을 폐위시키고 그것을 폐물로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인가? '사회학적 철학'이라는 아이디어를 위한 때가 무르익은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모순어법일 뿐인가?(텍스트, 261쪽)”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회학적 분석은 그것을 파괴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문화 생산의 장과 역사적인 공간 안에 다시 위치시킨다. 이는 다양한 철학들과 그 계승 논리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철학자들을 그들의 유산 속에 새겨진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다.(텍스트, 261쪽)”

“만약 역사적 사회과학이 철학에 위협이 된다면, 그 이유는 이제까지 철학이 독점해 온 영역들을 그것이 빼앗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텍스트, 262쪽)”

“철학은 항상 자신의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으로 감지된 사회과학의 존재를 참기 힘들어했으며(텍스트, 295쪽)”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를 하고 싶은 것이 바캉의 의도였다면, 내게 있어서 최초의 그 의도는 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초대받지 못한 기분이다. 초대장을 손에 쥐었지만 연회장이 도무지 어디인지 찾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대답은 내게 많은 의문을 지워주었다.

바캉이 “사회학자를 예술이나 철학에 무지몽매한 증오의 주창자로 그려 낸다”라고 한 맥락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쓴 푸코가 연상되기도 한다. 마네의 그 그림은 목적을 다분히 가지고 그린 그림이긴 하지만, 이로 인해 문외한은 절대 손댈 수 없다고 여겨진 그림이란 영역에 아우라를 망가뜨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 바캉이 질문한 것처럼, “사회학은 철학을 폐위시키고 그것을 폐물로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인가?(텍스트, 261쪽)” 라는 질문을 한 것에서 상당한 위로를 얻었다. 사회과학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학자 조차 나와 같은 의문을 품었다는 지점에서 감사했다. 부르디외가 답한 "만약 역사적 사회과학이 철학에 위협이 된다면, 그 이유는 이제까지 철학이 독점해 온 영역들을 그것이 빼앗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텍스트, 261쪽)” 라고 한 맥락이 내겐 인상적이었는데, 사회학은 철학을 위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철학의 상태가 테제고, 사회학은 안티테제이며, 아직 우리는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이 규정될 학문의 영역을 진테제라고 하면 이 모든 의문은 해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은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안티테제이기 때문에 실로 불안한 학문적 토대 위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테제에 기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시간적으로 테제에 후행할 수 밖에 없다

사회학의 존재조건이 안티테제임에 있다면, 나는 이 모든 의문을 감당할 자신이 생겼다. 그렇기에 사회학의 역사가 짧다는 것과, 사회학의 토대가 실로 흔들리기 쉬운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 까지 납득 할 수 있었다.

ᅠ 사회학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인의 자유에 대한 과대평가는 그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이고 순진하고 '치기 어린' 투쟁 형식에 뛰어들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텍스트, 316쪽)”

“나와 같은 입장을 방어하고자 할 때 우리가 젊은이들을 실망시킬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데 일부 어려움이 있다. 모든 지식인들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전복적인 의도가 때로는 풋내난다고, 즉 몽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실망시킨다.(텍스트, 316쪽)”

“젊은이들의 환상을 깨는 것은 당연히 즐거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들의 반항에는 꽤나 진지하고 심오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텍스트. 310쪽)”


철없는 생각을 언제까지 가져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었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닳고 닳아, 치기 어렸던 시절에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캐논으로 여길 생각들을 촌스럽고 덧없고 허무맹랑하다는 이유로 언젠가는 버리게 될 것이 두렵기도 하다. 더욱이, 스스로를 ‘치기어리다’며 자조하는 것은 괜찮지만, 남이 비웃는 것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바람 훅 불거나 지긋해 빠진 어른의 질문 하나 둘이면 수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Boys, Be Ambitious 하면 더욱 괴롭다. Ambition을 발휘할 영역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누군가가, “너 그거 후회한다”라고 말하면 찔리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 치기어린 생각을 하는 것이 내내 부끄러웠다.

부르디외의 말은, 이런 ‘치기어림’에 민감한 내게 크나큰 위로가 된다. 젊은이들은 필연적으로 ‘치기 어릴’ 수 밖에 없으며, 어른들은 이런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한 존재이며, ‘풋내나고, 전복적이고 몽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지극히 젊음스럽다면, 나도 언젠가 이 안개를 흩어버리는 사람이 될 지언정. 아직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을 지도 모르겠다. 혹자가 내게 “너 그거 허무맹랑하고 망상적이야” 라고 묻는다면, “부르디외가 이런 치기 어린 생각에는 진지하고 심오하며, 체념과 위선에 저항하려는 태도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해 줄 것이다.

하여, 여기 초대장이 있어도 연회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빛과 음악이 새어나오는 연회장의 두꺼운 문 앞에 기대어 앉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4. 다시 처음으로.


구조와 주체. 혹은 주체와 구조. 무엇이 ‘기’하여 무엇에 ‘승’하는가의 문제는 영원히 풀지 못할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실타래를 보고 ‘이 실을 풀어 보아야지’ 라는 간단한 마음을 시작한 일이, 끝은 물론이며 시작점이 어디였는지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온 것 같다는 정서를 느낀다. 이 매듭을 다 풀고 나면 사회학의 시효는 다하는 것일까.

구조와 주체에 대한 논의가 정리되고 나면, 매크로한 시각을 다루는 체계로의 사회학의 수명은 다하고 철학만이 남으며, 상호작용과 미시적인 연구를 하는 문화인류학만이 지금의 사회학을 대신하게 될까.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학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이 논지를 해결하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생각마저 해 본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학자들은 “구조”와 “주체” 사이에서 영원히 부유하고 말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수월하게 통합하는 방법은, 거시적인 차원은 체계로 보고 개인의 차원으로 내려올수록 상호작용으로 보는 스펙트럼으로 보면 된다는 비겁한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예언자”에게 스펙트럼이라는 애매모호하고, 뜬구름 같으며, 미꾸라지같이 비껴나가기만 하는 연표는 인가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쉽게 단언해 버리는 것은 평생을 연구에 바친 대 학자들을 능멸하는 행위이다. 나와 같은 후학은 이런 거인의 어께 위에 서서 이들의 질문을 받아, 한 발짝씩만 더 내딛는다면 과분할 것이다.

기능주의라는 편린을 벗을 수 없다고 단정지은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성급한 단정이었다. 기능주의를 벗기 위한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고 말하는 것도 사회학을 하는 이에게는, 비판사회학을 공부하는 이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말을 할 때 마다, 알튀세르가 떠오를 따름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있고, 지배적이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것. 즉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암울한 진단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근원적 인식론적 단절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우리의 이론 서사는 200년간의 사고실험을 통해 정립된 결과이다. 200년간,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끊임없는 사고실험을 했음에도 인류가 답을 내리지 못했다면, 이제는 이 서사를 어느 정도는 선을 긋고, 새로운 페이지를 넘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런 스스로의 대답은 너무나도 비겁하다.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너무나도 무력하며, 비극 서사를 잘 쌓아오다 마무리 할 능사가 없자 인물을 다 죽여 버리는 데우스 엑스 매키나적 결말만 낼 줄 아는 내 역량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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