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by J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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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의 작은 원룸에 살다가 널찍한 거실에 방 두 개가 딸린 집으로 이사오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술병과) 책이었다. 복층까지 합쳐서 열 평 남짓한 그 작은 공간에 (술병과) 책이 어찌나 많은지 주방 팬트리며 붙박이 옷장은 물론이고 그냥 마룻바닥에 책이 막 쌓여있을 지경이었다. 이사를 온 뒤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술장과) 커다란 책장 두 개를 사서 드레스룸의 한쪽 벽을 책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책장을 처음 들였을 때는 가지고 있던 책을 다 꽂아도 1/3 정도의 공간이 남았는데, 책이 점점 늘어나서 책장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하다가 부모님이 이삿짐센터를 불러 본가에 있던 내 책 수백 권을 전부 내게 덤핑하면서 (“이제 넓은 집으로 이사갔으니 네 책은 다 가져가라”) 이제는 이 집의 붙박이장과 TV장과 팬트리도 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혹자는 왜 다 읽은 책을 팔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들은 내가 이미 알라딘에 백 권이 넘는 책을 팔았다는 사실을 모른다(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읽지 않은 책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왜 읽지도 않는 책을 자꾸 사느냐고 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부터 다 읽은 다음에 새로운 책을 사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말로 변명을 갈음한다: “책은요 읽은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에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그저 자조적인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은 김영하 작가의 말이 진실을 담고 있음을 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모든 책을 정독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이내 무뎌진다. 그러다가는 이내 모든 책을 끝까지 정독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런 독서 방식이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책, 별로인 책은 빨리 덮어야 더 가치있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 읽는 즐거움이 아니라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산 책이라면(물론 양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지만)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어떤 주제에 관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면 한 권의 책을 정독하기보다 대립하는 시각을 제시하는 여러 책을 발췌독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실제로 “읽지도 않는 책을 왜 자꾸 사냐”고 묻는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밖에 없다.


“읽지도 않는 책을 왜 자꾸 사냐”는 물음의 기저에는 우리가 책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의 이분법만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 독서와 비독서 사이에는 책과 관계하는 수많은 방식이 있다. 우리는 책을 읽다 말기도 하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기도 하고,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통해 접하기도 하고, 그 책을 인용하는 다른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읽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그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책을 표지부터 표지까지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그 책을 정독한 사람보다 그 책을 읽지는 않았으나 다른 방식으로 그 책을 습득한 사람이 훨씬 정확하게 그 책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아무런 배경 독서 없이 플라톤의 <국가>를 꾸역꾸역 정독한 사람보다 원전을 읽지는 않았지만 <국가>에 관한 검증된 개론서나 해설서를 여러 권 읽은 사람이 플라톤을 더 정확하게 안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이와 같이 독서와 비독서라는 이분법에 가려진, 우리가 책과 관계하는 수많은 양상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이름을 붙인다. 바야르는 프루스트를 읽지 않았지만 프루스트에 대해 매일같이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으로서(그는 문학 교수다) 그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책을 연다. 그리고 프루스트를 읽지 않았지만 프루스트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자신이 프루스트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정확한) 자각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책을 많이 읽어온 사람들은 서론부터 무릎을 탁 칠 것이고,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저자가 읽지도 않을 프루스트를 왜 샀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당황할 것이다. 책을 싫어하지만 지적 허영심을 부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매뉴얼 같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은 보통의 독서 이력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책인 셈이다.


지인들은 내가 꾸며놓은 서재를 보고는 내가 책을 정말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 뜨끔하는 것이 있다. 나는 책을 별로 읽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의 이분법을 전제한다면 그렇다. 나는 책을 정말 좋아하지만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때도 있고, 책에 담긴 정보를 습득하고는 싶지만 재미가 없어서 정독을 하지 못할 때도 많으며, 그저 누워서 유튜브를 보느라 책을 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나는 학회 후배들의 초청으로 개강 세미나를 진행하게 되면 항상 칼 포퍼를 인용하지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은 적은 없다. 버트런드 러셀의 액자를 벽에 걸어놓고 있지만 그의 자서전과 논문 몇 편 외에는 읽은 것이 없다. 내가 그들의 책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유튜브로, 팟캐스트로, 온라인 아티클로, 논문으로, 이들이 쓰지는 않았지만 이들에 관해 쓰여진 단행본으로, 이들의 책을 인용하고, 묘사하고, 해설하고, 비평하는 텍스트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책을 사서 쌓아두는 행위 자체도 책과 관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책을 쌓아두면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다는 실용적인 측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한 설명은 언제나 그렇듯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글, <철학책을 쓰고 싶은데요>를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으리라:


“나는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책 자체, 특히 종이책의 장정과 속지의 물성을 좋아한다. 읽지도 않을 책을 사들여 곁에 쌓아놓는 것도 그래서다. 스스로를 책으로 에워싸면 묘한 신비감마저 감돈다. 괴테가 말했듯, "생각하는 인간에게 찾아오는 가장 아름다운 행운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을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경외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는 그는, 그의 작업장으로 쏟아져 내리는 종이 더미에서 괴테, 실러, 휠덜린, 니체의 책들을 구해낸다. 종일 노동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스스로가 마치 바스러진 책 꾸러미처럼 여겨지고, 몸에서는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난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책, 물성이 있는 그 종이책과 함께 고독으로 물러난다.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이라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썼다. 어슴푸레한 여명 속 한탸의 고독은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내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위로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프롤로그만 읽고 쓴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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