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혈투 끝에 타낙이 3위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제11전 칠레 랠리는 이번 시즌 마지막 그레이블 랠리로 남미 칠레 제3의 도시 ‘콘셉시온’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2019년 WRC 캘린더에 처음 이름을 올린 비교적 신생 랠리 중 하나로 2000년 시작되었던 국내 경기인 랠리 모빌(RallyMobil)을 모체로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아르헨티나 랠리에 이은 남미 랠리 2연전으로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캘린더의 유일한 남미 이벤트다. 2019년 개최 이듬해에는 군부 독재 시절의 헌법을 바꾸기 위한 국민 투표 때문에 경기가 취소되었고, 코로나 펜데믹까지 겹치면서 2023년에야 다시 개최됐다. 재미있는 건 2019년과 2023년 모두 오트 타낙(Ott Tänak)이 우승했기 때문에 WRC 칠레 랠리의 우승컵은 타낙만이 보유하고 있다. 지난 그리스 랠리에서 1-2-3 피니시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현대 진영으로서는 더블 타이틀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칠레 중부 비오비오주의 광활한 숲과 태평양에 인접한 서쪽 해변 인근을 오가며 열리는 칠레 랠리는 비교적 평탄한 그레이블 스테이지로 코너에 뱅크(경사각)가 붙은 경우가 많다. 덕분에 거친 그레이블이면서도 속도는 느리지 않은 편이다. 이 시기의 칠레는 남반구에 위치한 만큼 5월 봄 날씨에 해당하며, 비가 내릴 가능성도 있다. WRC 이벤트로 처음 열렸던 2019년이 바로 그랬다. 진흙투성이의 노면은 영국 랠리를 떠올리게 했다. 반면 비가 내리지 않으면 엄청난 흙먼지를 동반한다. 선두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은 또 한 번 노면 청소 담당이라는 부담스러운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뜻이다. 타이어에 위협적인 노면도 칠레 랠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바닥이 거친 데다 경사길이 많아 타이어와 브레이크 관리가 까다롭다. 올해는 16개 스테이지 306.76km 구간에서 경기가 열렸다.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은 챔피언십 포인트 1, 2위를 달리고 있는 누빌과 타낙을 출전시키는 한편 3번째 차에는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를 엔트리했다. 그리스에서 올 포디엄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현대는 더블 챔피언 타이틀을 위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누빌은 192점, 타낙 158점이고 9번째 타이틀을 노리는 세바스티앙 오지에(Sébastien Ogier)는 154점으로 누빌과 38점 차이다. 한 경기에서 딸 수 있는 최대 점수가 30점이기 때문에 이번 경기를 마치고 둘의 점수 차이가 60점 이상으로 벌어진다면 오지에는 사실상 타이틀 도전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후에는 누빌과 타낙이 팀 내 경쟁을 벌이게 된다.
누빌과 34점 차 포인트 2위에 위치한 타낙은 아직 실낱같은 타이틀 가능성이 남아있다. 게다가 2019년과 지난해 칠레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경험이 있다. 에사페카 라피는 이번 시즌 5번째 출전으로, 시즌 초 스웨덴 우승으로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이후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
도요타에서는 4명을 출전시켰다. 엘핀 에반스(Elfyn Evans)와 세바스티엥 오지에, 칼레 로반페라(Kalle Rovanperä), 그리고 사미 파야리(Sami Pajari)다. 로반페라의 출전은 당초 예정된 순서이지만 챔피언십 포인트가 팀 내에서 가장 높은 오지에가 남은 경기 모두 참가하기로 하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원래는 풀시즌 출전이었던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를 잠시 쉬게 하고 신예 파야리를 투입했다. 디펜딩 챔피언 로반페라가 휴식을 선언하면서 에반스와 가츠타에게 중책을 맡겼는데 결과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핀란드에서 4위, 그리스에서는 랠리2 머신으로 종합 4위라는 좋은 성적을 올린 파야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득점 담당은 오지에, 로반페라, 에반스로, 현 시점에서 도요타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드라이버진이다.
M-스포트 포드에서는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와 그레고와 뮌스터(Grégoire Munster) 외에 폴란드와 라트비아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신예 마틴스 세스크스(Mārtiņš Sesks)를 다시 투입했다. 다만 이번에도 그의 차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없는 푸마 랠리1이다.
9월 26일 금요일, 콘셉시온 북쪽에 위치한 6.79km의 캄파멘토 코누코(Campamento Conuco) 스테이지에서 테스트를 시작했다. 이전에 사용한 적 없는 새로운 스테이지였다. 선선하고 건조한 날씨 속에서 라피가 4번의 테스트 기록을 모두 사용하며 적응 훈련 및 세팅에 힘을 쏟았다. 테스트 기록도 3분 14.8초로 가장 좋았다. 세스크스와 파야리, 로반페라, 타낙이 그 뒤를 이었다. 지난해 사고로 고전했던 라피는 테스트 직후 “지난해에는 마지막 코너까지 즐거웠어요. 도전적인 랠리인 만큼 타이어 관리가 정말 중요합니다. 다시 지난번처럼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9월 27일 금요일, 콘셉시온 동쪽에 위치한 풀페리아(Pulperia, 19.72km)에서 칠레 랠리가 시작되었다. 13.34km의 레레(Rere)와 23.32km의 산 로센도(San Rosendo)를 달린 후 오후에 다시 반복해 달리는 SS1~SS6 112.72km 구간에서 경기를 치렀다.
역시나 이번에도 챔피언십 포인트 리더인 누빌이 가장 먼저 코스에 들어섰고 타낙, 오지에, 에반스, 포모 순이었다. 랠리1의 모든 선수가 소프트 타이어에 스페어 하나씩을 싣고 경기에 임했다. 10분 9초6의 기록으로 오프닝을 연 누빌은 노면이 너무 미끄러웠다고 밝혔다. “솔직히 정말 힘들었어요. 그립이 거의 없는 듯한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얼음 위를 운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프닝을 잡은 것은 오지에였지만 고작 3대가 달린 후 관중들의 안전 문제로 스테이지가 취소되면서 남은 선수들은 누빌과 같은 기록을 받았다.
SS2에서는 에반스 톱타임에 로반페라와 파야리, 오지에 등 도요타 세력이 빨랐다. 그 덕분에 오지에를 종합 선두로 에반스와 로반페라가 1-2-3로 선두권을 형성했다. 선수들은 그립이 급변하는 노면 환경에 고전했다. SS3 산 로센도는 토요일 경기 중 가장 긴 23.32km의 스테이지였다. 그런데 오지에가 4.4km 지점의 고속 코너에서 둔덕과 충돌로 타이어가 터지면서 시간을 잃었다. 오지에가 밀려났음에도 타낙은 오히려 파야리와 뮌스터에게 추월을 허용하며 5위로 순위가 밀렸다. 세스크스는 타이어 2개가 연속으로 터지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렀다.
연이은 타이어 트러블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오후에는 타이어 작전에 변화가 있었다. 누빌과 에반스, 로반페라, 파야리 등이 스페어 타이어를 하나 더 실었고, 라피는 하드 2개를 골랐다. SS4에서는 오지에가 톱타임을 잡은 가운데 에반스가 종합 선두를 이어갔다. 타낙이 2위로 껑충 뛰어올라 도요타의 1-2-3 대열을 흩어버렸다. 오지에가 SS5까지 연속으로 잡으며 질주했지만 선두와는 1분 28초 차이였다. SS6까지 마친 금요일의 순위는 에반스가 종합 선두, 타낙이 단 3초 차이로 그 뒤를 이었고 로반페라, 파야리, 뮌스터, 누빌, 라피 순이었다.
9월 28일 토요일은 15.65km의 SS7 펠룬(Pelún) 스테이지를 시작으로 25.64km의 로타(Lota)를 거쳐 이번 경기 최장인 28.31km의 마리아 라스 크루세스(Maria las Cruces)로 구성된다. 오전과 오후를 반복해 달리는 139.2km 구간에서 승부를 겨루었다. 세스크스를 선두로 오지에, 포모, 라피, 누빌 순으로 달렸다. 타이어는 대부분 하드를 기본으로 끼우고 소프트를 스페어로 준비했다. 포모는 하드 3개에 소프트 하나라는 변칙적인 타이어 전략으로 시작했다.
비가 내려 진흙탕이 많았던 오프닝 스테이지에서 에반스가 톱타임을 기록했고 이어진 SS8에서는 로반페라가 가장 빨랐다. 오전을 마쳤을 때는 에반스가 2개 스테이지를 잡아 선두 자리를 굳건히 했고 로반페라가 2위로 올라섰다. 스핀으로 시간을 잃은 타낙이 3위로 밀렸고 누빌은 4위로 올라섰다. 범퍼가 날아간 라피는 선두와 1분 39초 차이로 8위에 머물러 있었다. 오지에가 SS8에서 리타이어함에 따라 타이틀 경쟁에서 현대 듀오의 획득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스테이지 막판 바위와 부딪친 오지에는 정찰 주행 때는 바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사고 이유를 설명했다.
오후에 열린 SS10에서는 다시 에반스가 톱타임을 기록했다. 그런데 지독한 안개가 시야를 가린 SS11 로타에서 로반페라가 선두로 올라섰다. 이곳에서 가장 빨랐던 누빌은 선두와의 시차를 35초로 줄이는 한편 앞선 타낙과의 시차도 14.2초로 단축했다.
토요일을 마감하는 SS12가 시작된 오후 5시에도 안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SS12를 잡은 것은 놀랍게도 아드리안 포모였다. 로반페라가 0.8초 뒤진 기록으로 종합 선두 자리를 지켜냈다. 에반스가 2위, 타낙이 3위였고 누빌이 4위. 포모, 파야리, 뮌스터, 라피가 그 뒤를 이었다. 토요일까지의 순위에 따라 타낙이 13점, 누빌이 10점, 라피가 3점의 잠정 점수를 확보했다. 남은 일요일 기록에 따라 최대 12점(슈퍼선데이 7점+파워 스테이지 5점)의 추가 득점을 노릴 수 있다.
예전에는 초반 리타이어하거나 뒤처진 선수들이 일요일에 열심히 달릴 이유가 없었지만 새로운 득점 제도에 따라 적지 않은 점수를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득점 루트가 분산되어 있어 지나치게 복잡하고 우승에 대한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반대파와 일요일까지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즐길 수 있다는 옹호파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9월 29일 일요일,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13.2km의 라스 파타구아스(Las Pataguas)와 13.86km의 엘 포녠(El Poñen)을 반복해 달렸다. 오프닝 SS13은 오지에가 가장 빨리 달린 가운데, 로반페라와 에반스가 그 다음 기록을 작성하며 추격하는 현대 세력과의 시차를 벌렸다. SS14 역시 오지에 톱타임에 로반페라가 그 뒤를 이었다. SS14 직후 누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한계입니다. 엄청 빠른 스테이지인데 시야가 너무 좋지 않아요. 좋은 리듬과 적당한 속도의 경계를 찾아야 해요.”
남은 2개 스테이지는 모두 오지에가 톱타임을 기록하면서 슈퍼선데이 포인트를 챙겼고, 전체적인 순위에 큰 변화 없이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다만 라피는 막판에 다시 범퍼를 잃었고, 세스크스는 리어윙을 잃었을 뿐이다.
로반페라가 종합 선두 자리를 유지해 시즌 4번째 우승컵을 손에 넣었다. 같은 팀 에반스가 2위였고 타낙이 3위로 포디엄 마지막 자리를 차지했다. 점수로는 로반페라 28점, 에반스 21점, 타낙 20점, 누빌이 15점, 오지에가 12점이었다.
챔피언십 포인트에서는 누빌이 207점, 타낙이 178점으로 여전히 1, 2위를 달렸고, 오지에는 166점에 머물렀다. 남은 경기가 2개라 최대 60점까지 득점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41점 차이를 극복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따라서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은 누빌과 타낙의 경쟁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팀 득점에서는 도요타가 이번 랠리에서 1, 2위를 차지하며 35점이었던 점수 차이가 17점으로 줄었다. 최종전이 끝날 때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접전 상황이다. 이제 남은 경기는 단 2개에 불과하다. 오는 10월 17일부터 20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를 오가며 열리는 중앙유럽 랠리를 마치고 나면 최종전 일본 랠리만이 남게 된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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