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모르는 타인과 갑자기 밀폐된 공간에 남게 된다는 점에서, 택시는 독특한 대화의 공간이 됩니다. ‘안녕하세요’ 혹은 ‘어디로 모실까요’로 시작된 운전사와 승객의 대화는 특별한 감정 없이 흘러갑니다. 굳이 몸을 틀어 시선을 마주하지는 않죠. 대화를 하고 있지만, 마치 연극의 방백과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같네요. 김연우의 ‘이별택시’라는 노래에서도 그러잖아요.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우리는 택시 안에서 무심결에 감정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택시는 수많은 책과 영화 등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하죠.
마음을 편하게 하는 공간
tvN <현장토크쇼 택시>는 택시를 콘셉트로 한 토크 프로그램입니다. 2007년에 시작해 올해 10주년을 맞은 장수 프로그램이죠. 택시의 운전대를 잡은 진행자는 눈을 쳐다보기도 힘든 뒷자리 게스트에게 민감한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게스트는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죠. 특별한 우정 스토리를 들려준 양희은과 김나영, 나이 일흔에 미국드라마에 진출한 배우 윤여정, 가장 트렌디한 뮤지션 자이언티 등. 지금까지 수백 명의 게스트가 택시에 올랐고 차 안에서 털어 놓은 상처와 고민, 러브스토리는 화제를 낳아 기사거리가 되었습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승객과 교통상황에 집중해야 하는 운전자의 대화는 진솔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무심한 듯, 거리를 두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잖아요. 관찰 당하는 느낌을 겪지 않으니까요. 붉어진 얼굴도 슬쩍 넘어갈 수 있는 공간적 배려, 덤덤하게 본질을 파고 드는 대화가 이 프로그램의 매력입니다. 속 얘기를 잔뜩 쏟아내고 택시에서 내리면, 뜨거운 국밥 한 사발을 들이킨 기분이 들 것 같죠.
택시 기사의 넓은 식견과 혜안
그리스의 스토아파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격언에 “입은 하나고 귀가 둘임은, 말하는 것의 두 배를 듣게 하려 함이다” (We have two ears and one mouth so that we can listen twice as much as we speak)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경청이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의미겠죠. 택시운전은 이 격언에 따라 살기에 가장 적합한 직업일지 모릅니다. 승객들과 때마다 짧고 긴 대화를 나누게 되니까요. 덕분에 택시기사가 쓴 책에는 어느 문화인류학자 못지 않은 폭넓은 혜안이 보입니다.
<시드니 택시 기사의 문화 관찰기>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좋은 직업을 포기하고 호주에서 택시기사가 된 한국인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15년간 시드니에서 택시운전을 하면서 수많은 호주인의 언어습관과 태도를 경험했습니다. ‘땡큐’를 입에 달고 살거나, 차량 문을 쾅 닫는 습관을 보면서 국가별 특징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매주 아내의 묘지를 찾아 정성스럽게 꽃다발을 가져다 놓는 할아버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젊은 엄마의 사연을 통해 인생관이나 문화를 엿보기도 하죠. 덕분에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과만 교류한 일반 이민자와는 차원이 다른 통찰을 보여줍니다. 합리적이고 젠틀한 줄로만 알았지, 차에 타자마자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라디오 채널을 돌리는 백인들의 모습은 한국인에게도 상상하기 힘든 무례함이죠.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디테일, 택시기사들은 압니다. <시드니 택시 기사의 문화 관찰기>는 백인사회의 뒷골목을 자세히 그리고 있죠.
1995년에 발행한 자전적 에세이,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자는 1979년 최대 공안사건인 남민전에 연루돼 프랑스 파리에서 정치적 망명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택시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몸소 겪은 파리 문화와 사회 분위기를 기록했죠. 당시 철저하게 국가의 관리를 받던 한국과 대조적인 사회를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정치적 종교적 의견 존중을 강조하는 똘레랑스(관용)의 이념 정리와 사례가 묵직하게 담겨 있죠. 이 철학적인 택시운전사는 승객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음악과 역사에 대해 토론하기도 합니다. 11년 동안 60쇄를 찍은 책은 2000년대까지 대학생들의 필독서일 만큼 파장이 컸습니다. 파리를 누비는 택시운전사라니, 제목부터 끌릴 만하죠.
필연적 모험, 택시드라이버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직업이 택시기사인 인물들은 흔히 능글맞고 재빠릅니다. 혹은 부산하게 오가는 손님이 귀찮다는 듯 냉소적이죠. <로건>에서 찰스 자비에의 약값을 벌기 위해 고독하게 리무진을 모는 울버린처럼 말입니다. 암울한 도시를 그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택시드라이버>에서는 반항적인 택시운전사의 눈을 통해 불의와 타락의 현장이 생생하게 묘사됐죠.
일의 성격상, 택시운전자는 사건 사고를 목격하기 쉽습니다. 다양한 승객을 태우고 온 거리를 누벼야 하니 별의별 상황을 맞닥뜨릴 만합니다. 의지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개입도 가능하죠.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건 이동력과 수송력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죠. 그러한 택시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택시운전사>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독일인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떠난 택시운전사는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목격하게 되죠. 재빨리 서울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그는 굳이 현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갑니다. 양심과 상식에 따라 목숨을 건 것이지요. 자동차를 모는 직업이 아니었다면 대면하지 못할 상황이었고, 돌진하기 힘든 모험이었을 겁니다. 때때로 택시운전사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직업임이 분명합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숨은 영웅들
택시기사는 사회 공헌에도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지난 10월 부산의 한 택시기사는 비관하는 승객을 태웠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가 내린 후에도 관심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이후 다대포해수욕장에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 신고해 가까스로 승객의 목숨을 살리게 됐죠. 사람이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은 이처럼 생명을 구하는 귀중한 일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추격전이 벌어지는 일도 있습니다. 2014년 부산에서는 오토바이 강도를 쫓아 길을 막아선 택시 덕분에 범인이 체포됐고, 2015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는 택시기사와 안에 타고 있던 승객이 합심해 뺑소니 차량을 길가로 몰아세우기도 했죠. 2016년에도 새벽 출근 중이었던 50대 남성을 치고 달아난 차량을 택시 두 대가 끈질기게 뒤쫓았습니다. 덕분에 차량번호를 건네 받은 경찰이 범인을 잡아들일 수 있었고요. 올해는 폐지를 줍는 노인을 친 만취 뺑소니범을 붙잡은 사례도 있습니다. 이들 중 돈을 더 벌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나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음주운전과 뺑소니를 목격하는 불편한 순간들은 운전자에게도 잊지 못할 트라우마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현장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을 보내며, 필요한 순간에 사람을 살리는 숨은 영웅들이 택시를 몰고 있습니다.
사실 택시운전사만큼 한 사회의 문화와 구성원의 가치관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쉬이 택시를 떠올리면 도로 위의 무법자라고 치부해 버리기 쉽지만 모든 택시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머물다 가는 공간, 필요한 순간에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 택시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글. 안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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