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모습이 구석구석 남아 있는 고갯길은 사연이 많은 만큼 볼거리도 많습니다. 옛스러움과 멋스러움이 버무려진 누군가의 삶 같습니다. 산을 깎아 길을 닦고 다리를 놓기 전, 그 시절의 서울은 어땠던가요. 또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고갯길을 보며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놓아 봅니다.
미아리고개, 그 아래 숨겨진 이야기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_ 이해연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 中
혜화동에서 길음동 방향, 성북구 동선동의 미아리고개는 소위 말해 ‘한 많은 고개’입니다. 한국전쟁 때 북으로 끌려가는 가족과 지인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눈물의 고개죠. 전쟁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로 손꼽히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배경이기도 한 곳입니다.
원래는 소달구지와 마차가 지나기 어려울 만큼 험준하고 위험한 고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960년대 서울시가 완만한 경사의 도로를 놓고부터 다소 무심한 통행로가 됐습니다. 한 많은 울음소리를 들을 여유는커녕 빠르게 오가는 차들로 가득합니다.
고가도로를 위해 차도 양 옆으로는 옹벽이 섰고, 도로 하부에 굴다리가 뚫렸습니다. 차도인 상부와 사람이 지나다니는 하부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상부가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의 통행로라면 하부는 삶의 현장에 가깝죠. 옹벽을 마주본 주택가에는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역술원이 여럿 모여 있습니다.
미아리고개는 한스러운 통곡소리로 가득했던 고갯길입니다. 그 시절을 이해하고 나면 운명과 운수를 알려주는 점성촌이 이곳에 자리잡은 사실이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집니다. 이곳의 점술인들은 대부분 시각장애인인데요. 역학교육을 이수한 대한맹인역리학회 회원들이 수십 년째 함께 공부하며 삶을 꾸려왔습니다. 상도를 엄격히 준수하기 때문에 역서에 나와 있지 않은 실언을 금기시한다고 합니다. 영험한 초능력이 있는 도사라거나 처녀보살 등으로 자칭하는 간판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 했던 서러운 시절은 지나고 이제 서로 의지하는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고가차도 아래 공간을 재정비해서 문화공간으로 꾸미는 행정적 노력도 계속되고 있으니 내일의 미아리고개가 어떻게 변할지 기대됩니다.
녹번동 산골마을, 그곳에 사람이 산다
1972년 서대문구와 은평구의 경계를 지나는 통일로가 놓이면서 마을은 둘로 쪼개졌습니다. 산골고개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던 거죠. 민족통일의 의지를 담은 상징적인 도로를 짓기 위해 이전부터 있어온 마을을 분리시켰다니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한쪽은 녹번산골, 다른 한쪽은 응암산골로 지역구를 달리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산골마을’입니다.
도로로 갈린 녹번동 71번지와 응암동 31번지가 연결된 것은 43년 만이었습니다. 끊어진 산줄기에 다리를 놓는 생태연결로 사업 시행이 계기가 됐습니다. 한쪽 마을로 올라가서 다른 쪽 마을로 내려오는 길이 수수하고 여유롭습니다. 총 면적이 약 14,000제곱미터에 지나지 않으니 꽤 아담한 규모인 셈입니다.
한때 재개발 바람이 불어 사라질 뻔 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모퉁이마다 아기자기한 화분이 가득합니다. 세심한 손길의 흔적이랄까요. 오래된 마을답지 않게 세련된 색감과 설치물도 인상적입니다. 생태연결로가 생기자 구는 마을에 바닥을 깔고 비탈길에 계단을 설치했습니다. 물론, 삶의 터전을 새로이 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참여가 꾸준히 있었죠.
산골마을에는 10kW 태양광발전소가 있습니다. 위에서 보면 집집마다 옥상에 네모난 태양광패널이 보입니다. 밤에는 골목 가운데 태양광 LED등이 마을 길을 밝힙니다. 산골시어터(SANGOL THEATER)라는 극장에도 역시 태양광LED 등을 설치했고요.
그럴싸한 모습은 골목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집앞에 텃밭을 가꾸고 크기를 달리한 화분에 작물을 심습니다. ‘뭔가를 심고 가꾸는 노력’은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자 섬세한 감수성의 증거기도 하죠. 싱싱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어여쁜 마을입니다.
차도를 쌩 하며 지나가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빨갛고 노란 꽃을 보기 좋게 진열한 빨간 벽돌 계단이 보일 리 없죠. 이 작은 마을은 종종 콘서트와 바자회를 열고 단합대회를 합니다. 공방을 마련해 다양한 활동을 장려하고, 장터를 열어 직접 만든 비누와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기도 하죠. 마을회관에는 마을이 변화해 온 과정과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을 담은 사진을 액자로 진열해 놨습니다. 여기, 산골고개에 밝고 활기찬 마을이 있습니다.
성북동 산책 코스 북정마을
북정마을은 길을 오를수록 고즈넉한 분위기입니다. 비스듬한 땅에 지어진 집들이 부드러운 컬러로 어울려 산뜻한 인상을 주죠. 건물은 낮고 지대는 높으니 마을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아래를 멀리 관망할 수 있습니다.
올라와보지 않으면 풍경을 예상하기 힘든 이곳은 실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외진 골짜기였다고 해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가가 은거하는 곳이었죠. 넓은 길만 봐선 의아하겠지만 집 사이 골목을 꺾어 들면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기도 버거운 좁고 가파른 길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주변부의 아귀에 맞춰 어슷하게 자리잡은 집들은 꼭 퍼즐 같습니다. 외진 골짜기에 기역자 기와지붕이 이토록 많이 들어찬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1933년, 만해 한용운은 이곳 골짜기에 방 두 칸짜리 집을 지었습니다. 조선총독부와 등을 지겠다며 집을 북향으로 지었죠. 일제의 교육을 받게 할 수 없어 외동딸을 혼자 교육시켰고,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은 얼음장 같은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나라 잃은 자에게 어디든 편히 뉠 곳 없다는 이유였죠. 그가 살던 집 ‘심우장’에는 수령이 100년도 넘은 소나무가 넉넉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한용운의 강직한 성품과 침울했던 시간들이 바늘잎 사이로 켜켜이 고여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경로당 노랫소리가 경쾌하게 들립니다. 멀리 부채꼴 모양으로 늘어선 한양도성도 화려하게 반짝입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산책하고 싶은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
한 번 상상해 볼까요? 근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수풀이 우거져 있고, 힘주어 디뎌야 올라갈 수 있는 가파른 고갯길을. 가로등도 없던 시절, 고갯길은 얼마나 스산했을지 생각만으로 아찔합니다. 버티고개는 바로 그런 음침한 고갯길 중에서도 대표격이었던 곳이죠.
버티고개 3거리는 한남대로와 다산로, 장충단로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강북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도로가 없던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장사치들에게 중요한 통행지였습니다. 좁고 험준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넘어가야만 했죠. 사람 많은 관광지에 소매치기가 넘치고, 망망대해에 화물선을 쫓는 해적이 출몰하듯 고개에는 도적떼가 들끓었습니다. 금품 갈취는 물론 허무한 인명피해도 생겼습니다(어르신들이 ‘밤중에 버티고개 가서 앉을 놈’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군졸들은 밤에 순찰을 돌았고, 급기야 무성한 나무들을 베어내기 이르렀습니다.
수백 년 뒤, 버티고개를 지나는 길에는 4차선 도로가 생겼습니다. 다산로가 뚫리면서 통행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남산과 매봉산은 단절되고 말았죠. 2012년에는 이들 산을 잇는 생태통로가 완공됐습니다. 경관까지 고려한 생태통로는 부드러운 곡선형으로 지어졌고, 1만 7천 그루가 넘는 나무가 심어졌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산길은 한번도 끊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성되었고요. 도적떼가 들끓던 험준한 고개는 이제 자연친화적인 주거지로 탈바꿈했습니다. 매일 걸어도 질리지 않을 산책길은 동네의 자랑이 됐습니다.
자하문 고개, 역사와 문학을 만나다
보랏빛 노을이 고인다는 의미로 자하(紫霞:보라빛 노을)문이란 별칭이 붙은 창의문은 조선 성곽의 성문인 사소문 중 하나입니다. 청와대 근방에서 자하문로를 따라 쭉 올라가면 한쪽에는 성벽이, 다른 한쪽에는 성벽 위의 문루를 볼 수 있습니다.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자하문은 다행이도 원형이 잘 보존돼 있죠.
종로구 사직동까지 이어지는 인왕산로는 산기슭의 고즈넉한 드라이브코스입니다. 산의 정기를 받으며 보도로 자근자근 산책하기에도 좋습니다. 서울을 한눈에 조망하는데 이만한 곳이 있을까 싶죠. 시인 윤동주도 이곳 인왕산에서 산책을 하며 시를 다듬었다고 합니다. 자하문에 닿기 바로 직전에 보이는 ‘시인의 언덕’이 시인을 기리고 있습니다. 경치가 수려한 언덕에서 맑은 시와 외로운 청년을 떠올리자니 조금 가여운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시인의 언덕 아래로는 독서와 사색을 할 수 있는 문학관과 도서관이 이어집니다. 윤동주 문학관은 시인의 일생이 보이는 사진자료를 전시하고 시 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합니다. 문학관을 끼고 더 올라가면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나오는데요. 길을 따라 인왕산 기슭에 문학의 흥취가 가득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다녀간 시인의 채취를 맡으며 숲길에서 몇몇 구절을 곱씹게 되기도 하죠.
고개들은 대부분 산자락이다보니 정말 가파릅니다. 청운동 자락길도 마찬가집니다. 도서관을 지나 청운공원까지 완만하게 올랐다가 돌연 가파르게 꺾이는 길이 아찔합니다. 다행히 자동차가 잘 버텨주어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급격하다가도 부드러운 고갯길의 굴곡은 알 수 없는 인생 여정과 비슷하죠. 좋은 기억은 오래 간직하고, 끊어진 관계에는 다리를 놓고, 전보다 더 아름답게 가꾸려 애쓰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고갯길 드라이브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글. 안미리
사진. 안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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