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설렘으로 가득했던 스물 여섯, 첫 차와 그를 만났습니다
스물 여섯의 겨울을 생각하면, 두 가지 추억이 떠오릅니다. 인생의 첫 번째 차가 생긴 것, 그리고 그 차를 가지고 떠난 스키장에서 그를 만난 일.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의 어느 때보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겨울이었습니다.
차를 좋아했던 아빠는 안전과 효율을 고려해 직접 차를 골라주셨어요. 이 차를 고른 이유를 묻자 아빠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말했죠. ‘가장 무난하게 오래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너무 작지도, 부담스럽게 크지도 않은 차체와 담백한 디자인은 저에게 단순히 첫 차 이상의 만족을 줬습니다. 특히 또래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가장 고마운 존재이자 자랑거리였죠. 친구들이 제 차를 ‘달팽이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늘 저와 함께였던 자동차는 스물 여섯의 저에게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들어줬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해는 유난히 자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금요일 저녁, 친구와 표지판만 보고 한없이 직진해 부산으로 가기도 했고, 주말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파주나 춘천 등의 근교로 드라이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서부터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의 스키장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날도 어김없이 조금 들떠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저녁 즈음에 떠나 밤부터 새벽까지 스노우보드를 타고 돌아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와 친구 근처로 조심스럽게 두 남자가 다가오는 거예요. 서울로 돌아갈 버스를 미리 예약하지 못했다며, 카풀이 가능하겠냐고 물어왔습니다. 평소라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거절했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흔쾌히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인생의 첫 차를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자랑하고 싶었던 어린 마음이었을까요?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 둘은 사기꾼도, 강도도 아니었습니다(물론 두 사람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하고 태웠습니다).
서울로 가는 3시간 동안 뒷자리에서는 제 친구와 남자 한 명이 단잠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운전하는 저와 앞자리에 앉은 남자는 몇 시간 동안 스노보드를 탔던 피곤함은 잊은 채 오랜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저보다 두 살이 어렸던 그는 내릴 때가 돼서야 제게 구겨진 버스 티켓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버스 티켓이 있음에도 저와 함께 가기 위해 카풀을 요청한 거죠. 그 전까지만 해도 그 해의 가장 떨리는 순간은 첫 차의 스티어링 휠을 잡았을 때라고 생각했는데, 그 티켓을 보던 순간, 그날보다 조금 더 떨렸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부터 제 차의 조수석은 매일 그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열선시트를 켜두고는 따뜻한 커피를 나눠 마시기도 했고, 차에서 내린 후 헤어지는 게 아쉬워 창문을 가운데 두고는 몇 번씩 입맞춤을 하기도 했어요. 자동 세차장에서 세차를 하는 동안 느꼈던 달콤한 고립감은 또 어떻고요. 무난한 컬러의 차였지만, 그는 멀리서도 제 차를 알아보고 힘껏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무난한 컬러의 제 차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모델 사이에서도 달라보이는 뭔가가 있다더군요.
연애를 하면서 그를 자주 바래다주곤 했습니다. 의아하게 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꼭 남자가 여자를 태워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건 우리만의 연애 방식이고, 그걸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데려다주는지, 이 차가 누구의 차인지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죠. 우리는 차를 매개로 만났고, 이 차 안에서 함께 추억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습니다.
물론 그도 남자친구로서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차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었지만, 데이트를 할 때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제 몫만큼의 수고를 해줬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도착지를 검색하거나 블루투스로 들을 근사한 음악 플레이 리스트를 짜는 건 늘 그의 몫이었습니다. 차를 좋아하지만 차를 관리하는 방법은 몰랐던 저를 위해 엔진오일이나 에어필터, 타이어 공기압 같은 체크 리스트를 짜는 것 역시 그였습니다. 이따금 차를 정비하는 날 그는 신선한 데이트라며 즐겁게 동행해줬어요. 저는 남자라는 이유로 괜한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저에게 더 애정을 쏟을 방법을 찾는 그가 고마웠고, 그런 그가 정말 좋았습니다.
연애를 하면서 저만큼 저의 첫 차에 애정이 생긴 그는 언젠가 면허를 따고, 차를 사게 된다면 자신도 똑같은 차를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커플티라면 질색하던 저였지만 같은 차를 끌고 다니는 건 꽤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갖게 될 첫 차의 조수석은 당연히 제 자리라며, 당장 벌어지지 않을 일을 두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기도 했죠. 그렇게 옆자리에 앉아 꽤 먼 시간의 약속까지 했던 우리는 생각보다 사소한 이유로 연애를 마쳤습니다. 매일 그와 입을 맞추곤 하던 그 공간의 기억이 아프게 다가올 때도 있었지만, 가장 뜨겁게 설렜던 순간을 잊고 싶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의 자리에 다른 친구들을 태운 채 다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고, 때가 되면 혼자 정비소도 방문하면서 저만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함께 알고 지내던 친구를 통해 그가 면허를 땄고, 새 차를 구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설마 했는데 그의 첫 차는 제 차와 같은 바로 그 차였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내비게이션에 갈 곳을 찍고, 음악을 틀어주던 사람은 더 이상 없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첫 차를 샀던 저의 스물 여섯 그때처럼 마냥 설레는 기분일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또 한편으로 그때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간직하고 있어준 것이 고마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조수석에는 다른 이가 타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그도 곧 알게 되겠죠? 매일 나의 연인이 골라준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요. 우리는 각자의 차 안에서 또 다른 설렘과 뜨거운 연애를 기다리고,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때의 우리가 그랬듯.
사진. 장은주
글. 강예솔
<나일론>과 <플레이보이>를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로 흥미로운 모든 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특히 여행과 자동차에 관한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글을 쓰고, 취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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