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MG 저널 Jun 26. 2018

춤추는 바람의 궤적

발리 짠디사나 여행에서 바람처럼 일어난 이야기


기억은 바람과 닮았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우리에게 어떠한 흔적을 남김으로써 그 존재를 증명합니다. 바람이 알게 모르게 물들여놓은 여행지에서의 즐거운 한때를 살짝 엿봅니다.



발리 라마짠디다사의 지배인은 내 예약이 단 하루인 것을 보고 “너무 짧아요!”라며 안타까워했는데, 내가 그의 말을 정말 이해하게 된 건 그날 저녁 무렵부터였다. 겨우 오늘 여기에 왔을 뿐인데, 내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상식 밖의 상황 같았다. 단 하루 머무는 여행객을 위한 위로일까, 내가 예약한 방은 가장 저렴한 것이었으나 지배인은 두 단계인가를 업그레이드해주었다. 바닷가에 가깝게 위치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방까지 짐을 옮겨준 직원은 수다스러운 청년이었고,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부분까지 구석구석 열심히 소개했다. 청년이 방을 나간 후 그가 ‘원더풀’을 섞어가며 설명한 몇 가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더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금고는 이미 잠금장치가 외부로 노출된 채 닫히지 않았고(일단 금고 문이 닫혀야 잠글 수도 있고 또 열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욕실의 수압은 몹시 약해서 뭔가 큰 볼일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상을 줬다. 그는 좋아하는 한국 음식과 스타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했는데, 자신을 반하게 했던 그 고유명사들이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고기? 갈비? 떡볶이? 김치?” 온갖 음식이 나열된 후 그는 ‘김치’에서 반응했고, 마찬가지로 온갖 스타들이 나열된 후 겨우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기억해냈다. ‘이민호’에 대해서 끝없는 찬사를 늘어놓던 그는 내게 다음 일정이 혹시 부산이냐고 묻고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 실망한 듯했다. 왜 ‘부산’이어야 하는 거냐고 묻자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부산을 알아. 한국에 있는 도시지?” 

리조트 안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 청년은 한국말 몇 마디를 구사하며 끝에는 꼭 “고우 투 부산?” 하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반복해서 듣다보니 ‘굿나잇’이나 ‘굿모닝’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말이기도 했다. 

발리 동부의 짠디다사는 서두를 게 없는, 속도가 느린 동네였다. 곳곳에 푸짐한 의자가 놓여 있고, 은퇴한 사람들 혹은 긴 휴가를 받은 사람들이 느리게 걷고 있었다. 나와 L처럼 겨우 24시간을 머물다 가는 사람은 드물어 보였고, 그런 우리를 먼저 알아본 사람들은 자꾸 말을 걸어왔다. 언제 떠날 거니? 어디로 가니? 교통편이 따로 있니? 없다면 내가 좋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어…. 곁을 스쳐가던 오토바이부터 예약해둔 레스토랑의 픽업 차량까지 열이면 아홉은 다 그런 걸 묻곤 했다. 아 나는 3주 후에 떠날 거야, 혹은 한 달쯤 푹 쉴 생각이야,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반복되는 질문과 제안 속에서 결국 우리는 다음 날 떠나는 차편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최대한 운용해보겠다는 듯이 눈과 귀를 크게 열고 리조트 곳곳을 누볐다. 



라마짠디다사는 바다보다 훨씬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리조트 앞뜰에서 저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면 지금 이곳이 아파트 3-4층 높이 정도는 될 것처럼 여겨졌다. 나와 L이 오전 내내 앉아 있던 선베드는 파도가 전혀 덮칠 수 없는 높이였으나 파도가 어찌나 거친지 내 뺨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발리에 머무는 내내 바람이 몹시 불었다. 오두막 하나를 보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을 때 그 오두막이 5미터쯤 옆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착시현상인지 진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만큼 바람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곳이었다.

아마도 부모를 따라 이곳에 왔을 아이들은 한 뭉치의 솜처럼 엉켜 놀고 있었다. 그중에 무리에서 이탈한 여자아이 두 명이 우리 앞을 재잘대며 가로질러갔다. 흔하고 사소한 장면이었다. 아이들은 지나갔고, 나는 보이는 것을 아무거나 휴대폰으로 찍고 있었다. 이건 저장용보다 셔터 소리 그 자체에 방점이 있는 행위였다. 하늘도 찍고 저기 울타리도 찍고 페디큐어한 발도 찍고 방향을 돌려서 내 얼굴도 찍고 그의 얼굴도. 순간 큰 바람이 불었고 내 긴 머리카락이 우산을 펼칠 때처럼 휙 솟았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때 저만치 지나갔던, 이미 내 무대에서 퇴장한 아이들이 다시 달려왔다. 뭔가 문제가 생긴 듯 둘 중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아이의 엄마가 한달음에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인형의 이름인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다른 아이가 뭐라고 주섬주섬 설명했고, 아이의 부모들이 서둘러 바다 쪽 울타리로 몰려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엉덩이를 들지 않고도 무슨 상황인지 주워 담을 수 있었다. 곧 리조트 직원 두 명이 나타났고, 그들은 긴 뜰채처럼 보이는 도구를 들고 울타리 아래 바다로 내려가려 했다. 이쯤 되면 얌전한 관객도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 평화로운 리조트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소동에 나와 L도 일어나 울타리 쪽으로 다가갔다. 저 아래 바다에 표범인지 기린인지 사자인지 모를 인형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이곳은 해변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형태의 리조트가 아니었다. 울타리 아래에 파도 치는 바다가 있었고, 그렇다보니 이 리조트는 바다에서 헤엄치기보다는 바다를 바라보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아래, 그러니까 절벽 아래로 뭔가를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는 건가? 어른의 모자나 숄 따위라면 그건 그대로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지만, 이건 아이의 인형, 아니 아이의 친구였다. 서럽게 울부짖는 소리는 파도와 바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눈으로도 충분히 그 아이가 얼마나 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리조트 직원들이 도구로 인형을 꺼내려고 했지만 인형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인형은 저만치 멀어져가다가도 파도 때문에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쩌면 그런 척을 하면서 점점 멀어지는 걸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파도 때문에 불가능해서 다시 올라왔고, 상황에 별다른 진전이 없어서 우리는 그걸 보다가 그만 일어섰다. 그리고 숙소 테라스에 수영복을 빨아서 널어두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슬쩍 저쪽을 보니 마치 숨은 그림찾기처럼 아까와 같은 듯 뭔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가 있던 2인용 선베드 옆에는 같은 모양의 선베드가 있었고 노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없이 할머니만 있다는 것, 아까와 달라진 건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쪽을 향해 휴대폰의 촬영 셔터를 눌렀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내 앵글 안으로 들어왔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 안에는 할아버지에게로 아이의 부모님이 다가와 인사하는 장면이 찍혔다. 아이가 인형을 끌어안고 팔랑팔랑 춤을 추는 장면도 찍혔다. 나는 숙소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저 사람들 인형 구했나봐!” 



내가 목격한, 휴대폰에 담긴 몇 장면은 이미 ‘결말’ 부분이었다. 그리고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보고 있었던 건이 소동의 ‘위기’쯤 됐다. 나는 그사이 ‘절정’을 놓친 것이다. 그걸 유추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인형을 절벽 아래에서 구해온 걸까? 정황상 그런 것 같았는데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곳을 떠날 시간이기도 했다. 강한 햇볕과 바람 때문에 수영복은 그새 말라 있었다.

짐을 꾸려 로비로 나갔을 때, 인형을 든 아이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이미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떠나는 중이었다.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 된 나는 자동차에 올라타려는 아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인형을 찾으셨네요? 어떻게 구했어요?”

“아아, 거기 앉아 있던 할아버지 봤어요? 그분이 바다로 이렇게 뛰어들었어요. 71세래요, 믿기지 않아요!”

그는 ‘인크레더블’을 외치며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궁금증을 해소한 나는 이제 여유로운 태도로 휴대폰의 사진들을 ‘관람’하게 됐다. 바람이 날려보낸,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가 기사회생한 인형은 정확히 ‘기린’이었고, 사진 속에는 슈퍼히어로라는 게 증명되기 이전의 조용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바다로 몸을 날리는 할아버지를 직접 보지도 못했지만 그래서 그 부분은 더 매혹적이었다. 재미있는 건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측면과 후면이 내 사진에 남아 있는데, 71세의 남편이 거친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올라오는 시점에도 할머니는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 게 분명하다. 히어로 남편이 출동할 일 말이다.

사진에는 우리에게 다가와 작별인사를 하던, 이민호와 김치를 좋아하는 직원도 남아 있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보이지 않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분명한 존재도 있다. 개구진 바람 말이다. 바람은 사진 곳곳에 흔적을 남겨두었다. 걸어가던 두 아이의 흔들리던 원피스, 유연하게 움직이던 야자수, 춤추던 파도,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 구름, 그리고 우산살처럼 활짝 펴졌던 내 머리카락이 어떤 궤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글. 윤고은(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이철민
 
  

현대자동차 사외보 <현대모터> 2018년 5, 6월호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 뉴스 미디어, HMG 저널 바로가기

▶ http://blog.hmgjournal.com

작가의 이전글 맥주가 당기는 밤, 서울 수제 맥주 맛집 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