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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22. 2023

신비의 도로 #1

제주 기담집1

 


 내가 그 편지를 발견한 장소는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였다. 그 해변은 몇 년 전 근처에 커다란 발전소와 항만이 신설돼 관광지로서의 인기를 잃어버렸고, 한적했다. 내가 그 근처에 숙소를 정한 이유였다. 평소 그 해변으로 곧잘 책을 읽으러 다녔는데, 오가는 길에 매번 눈에 밟히는 카페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으므로(지금이라고 크게 나아진 건 아니지만) 주로 숙소에서 커피를 내려 마셨고, 카페에 갈 일이 없었다. 섬을 떠나는 전날, 침구류를 세탁하기 위해 나왔는데 마침 세탁방이 그 카페 맞은편이었다. 짧은 섬 생활을 이미 정리했고 더 이상 지출할 비용이 없었으므로, 세탁이 끝날 때까지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전통적인 제주 건축양식을 따르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카페였는데, 주인은 안채에서 거주하고 바깥채를 카페로 만든 것 같았다. 하얀색 벽에 나무로 만든 미닫이문과 커다란 통창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벽 한 쪽에는 역시 나무로 만든 마름모꼴의 장식이 붙어 있었는데, 마치 드림캐쳐 여러 개를 정교하게 이어 붙여 만든 듯, 특이한 모양의 장식이 인상깊었다(정확한 모양이 기억나지 않는다). 카페 입구에는 담이라기 부르기도 민망한 낮은 돌담이 마당의 형태를 간신히 만들어 냈고, 그 안에서 뚱뚱한 주황색 고양이가 햇빛을 받으며 연신 하품하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먼저 몽롱하면서 매캐한 향에 코가 간질거렸다. 입구 근처 선반 위에서 향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맡았던 모기향 냄새에 달큰한 감귤 향이 섞여 났다. 주기적으로 환기만 한다면, 또 향이 너무 강하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20평이 안 돼 보이는 아담한 내부에는 카운터와 커피머신이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고, 양옆에 조그마한 방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방은 다시 작은 공간들로 나눠져 있었지만, 문은 따로 없어서 개방감이 느껴졌다. 나무 구슬로 만든 문발이 방 입구에 치렁거리게 늘어져 있어서 점집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문지방의 높이가 생각보다 높아 의식하지 않았다가는 걸려 넘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방 안은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낯선 책들, 오래된 가구들로 빼곡하게 꾸며져 있었다. 군데군데 외벽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마름모꼴의 장식들이 있었다. 노래가 나오지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단체 손님이 없어서 좋았다.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키는 170 중반에 덩치가 컸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 어깨에 닿을 법한 긴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묶었고 구레나룻과 수염이 수북했다. 동그란 갈색 안경이 탁월하게도, 그의 인상을 훨씬 부드럽게 만들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한 카페에서 연갈색 앞치마를 두르고 커피를 내리는 것과는 안 어울리는 외모였다. 나는 숙소에서 이미 아메리카노를 마셨으므로, 라테 베이스에 달콤한 휘핑크림을 얹은 아인슈페너를 주문했다. 나이테가 보이는 동그란 나무 컵 받침대와 함께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코코아 가루가 뿌려진 크림은 너무 달지 않아 입안에서 라테와 조화를 이뤘다. 결론적으로, 카페는 마음에 들었으며, 떠나기 직전 멋진 장소를 발견하는 건 여행의 불문율과 같다는 걸 다시 한번 입증했다.

 서론이 길었는데, 으레 괜찮은 카페에 소장된 책들은 항상 좋거나 그 이상이라는 가설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카페 주인의 취향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지만,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는 카페 주인치고 절대 자신의 공간에 아무 책이나 들여놓지 않는다. 특히 이런 소박한, 매상보다 카페를 차리는 일 자체가 목적이었던(추측이지만) 가게에서는 어쩌면 원두를 고르는 과정보다 책을 고르는 과정이 더 까다로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체 없이 마음에 드는 책 세 권을 꺼내 왔고, 두 번째 책을 훑을 때 그 책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꽤 두툼한 편지 봉투가 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우편번호는 물론 보내는 사람의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받는 사람 란에 ‘정’이라는 이름과 봉투 우측 상단 우표로 보아 편지를 보내고자 했던 의지는 분명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우표는 빨간 말 모양의 등대가 담겨 있었다. 섬 북쪽 이호테우 해변에 있는 등대였다. 주변을 한 번 돌아봤지만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짝사랑하는 여자애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십대 소년의 마음으로 편지를 꺼냈다.

 세탁물도 잊은 채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다 읽고 나서, 나는 갈등했다. 카페 주인에게 편지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마음과 그 편지를 잠시 ‘빌려’ 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만약 카페 주인이 이 편지를 알고 있었다면, 관련도 없는 책에 대충 껴 놓아야 할 이유는 없었을 터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괜찮은’ 카페에서 책을 정리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으니까. 어쩌면 이 편지는 이미 ‘정’에게 닿았고, ‘정’이 세상에 공유하고 싶어 장난스럽게 이 책 사이에 껴 놨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은 그럴 수 없다.  만약에 카페 주인이 의도한 ‘보물찾기’라면? 편지가 아직 ‘정’에게 가는 중이라면?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을 때, 내 발걸음은 조급했고 심장은 거칠게 뛰었다. 물론, 내 주머니는 이전보다 불룩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지만, 나는 어렸을 적 오락실에 가기 위해 어머니의 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냈던 순간 외에는 뭔가를 ‘오랜 시간 빌려’본 적 없는 사람이다. 숙소에 도착해서, 내가 가져온 책 사이에 그 편지를 끼워 놓고 나서야, 세탁물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공항 보안 검색에서도 적발되지 않았고, 덕분에 이 지면에 옮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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