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덩 Oct 22. 2023

신비의 도로 #2

제주 기담집1

 

***

 정아. 언제나 편지의 첫 문장에서는 어색함을 주체할 수가 없네. 날씨가 좋다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너를 처음 만난 순간을 얘기해야 할까? 쓸데없는 얘기들을 넋두리처럼 늘어놓다 보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장황해져서 결국 다시 쓰게 돼. 우리가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나누던 순간들처럼. 관두기로 할래. 언제나 그런 호들갑을 떠는 건 너였잖아.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색함이 있어. 내 편지가 조금 서툴더라도 이해해 줄래?

너가 꼭 듣고 싶어했던 유럽 여행이야기를 해줄게. 만나서 듣겠다며 여행 중일 때는 한사코 얘기도 못하게 했잖아. 너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걸. 파리에 도착했을 때, 사실은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니였어. 택시를 타고 이동할 때, 길이며, 건물이며, 사람 심지어는 가로등과 신호등마저 너무 달라서 신기한 기분이기는 했어.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왔구나 싶은 실감도 나고. 도시의 소란스러움과 희미하게 풍기는 하수구 냄새에 멀미가 나기도 했지. 너가 조심하라고 당부했듯, 소매치기와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긴장한 탓이기도 했어. 숙소에 도착해서는 바로 곯아 떨어졌다니까. 덕분에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미리 알아둔 식당에 갔어. 카푸치노와 크로와상, 오믈렛을 먹었어. 맛은 있었지만 솔직히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어. 나 둔감한 거 알잖아. 만약 너가 같이 있었다면, 그 조그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타박했을 텐데. 차이점을 열개는 넘게 들어가며 말이야.


***

 정아. 한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어. 지난번에 네 생각을 했다가 웃음이 났거든. 웃다가, 울었어. 그래서 못썼어. 그거 알아? 내 방에 네 흔적들이 참 많아. 눈을 감지 않아도, 너가 서있던 뒷모습이 떠올라. 이상하지? 앞모습은 기억나지 않아. 갑자기 네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식겁해서는 갤러리를 뒤지고는 해. 생각보다 나는 상상력이 부족한가봐. 내 방 바닥에 모래를 깔아 두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러면 네 발자국이 남아있을 텐데. 그 발자국 위에서 네가 춤을 출텐데.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좋아서 밖으로 나왔어.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공원이름으로 된 역에 내렸어. 사람이 참 많더라. 나무들 사이에서 단체로 박수 치면서 춤을 추는 아주머니들이 있었어. 왠지 모르게 기운이 났어. 기분도 좋아졌어. 마침 배가 고프더라.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샀어. 나무 벤치에 앉아서 한 입 베어 물었는데, 너무 맛있었어. 4, 5살쯤 되어 보이는 애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더라. 그 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듣기 좋았어. 귀여운 개들이 많았어. 게이트볼을 치는 노인들,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트랙을 뛰는 사람들. 모든 장면이 마치 영화에 나오는 한 순간 같았어. 나는 충동적으로 제주행 비행기표를 샀어. 틀에 박힌 일상에서 도망치는 영화 주인공처럼 말이야. 놀랍지? 그런 역할은 언제나 너가 어울렸잖아. 네가 제주도를 자전거로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에도 너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너한테 욕이라도 해서 말렸어야 했을까? 미쳤냐고, 협박이라도 했었어야 했을까?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유럽에 함께 가자는 약속을 저버린 건 나였잖아.


 출발은 당장 내일 모레야. 숙소와 맛집을 알아보는 중이었어. 너가 갔던 장소들이야. 이상하게 설렌다. 널 만나러 가는 기분이야. 다시 편지할게. 너의 친구가.

이전 01화 신비의 도로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