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덩 Oct 22. 2023

신비의 도로 #3

제주 기담집1

 정아. 놀라운 얘기 해줄게. 나도 자전거를 빌렸어. 물론 너가 했던 것처럼 ‘진짜’ 자전거는 아니야. 전기 모터가 달려서 조금만 밟아도 잘 나아가. 오르막길도 쉽게 올라갈 수 있어.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얼마나 어색했는지 몰라. 숙소까지만 타고 오는데도 차들이 너무 빨리 달려서 무서웠어. 오늘은 시내에서 천천히 인도로 다녔는데, 내일부터는 차도로 달려야 할지도 몰라. 너는 참 용감했구나. 고등학교 다닐 때 기억나? 옆 반 은정이가 내 체육복을 빌려 가고 돌려주지 않아서 내가 쩔쩔매고 있었잖아. 그때는 왜 그렇게 걔가 무서웠을까? 짙은 화장을 하고, 피어싱이 잔뜩 달려있고, 담배를 펴서? 잘 나간다는 선배들이랑 자고 다닌다는 소문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기 짝이 없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무기력해서 그저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어. 그때 너가 아무 말없이 내 체육복을 찾아 가져왔잖아. 솔직히 고마움 반 두려움 반이었어. 그 패거리가 내게 화풀이를 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었거든. 그날따라 너의 오지랖이 짜증나기도 했어. 나란 사람 참 별로네. 그렇지? 나한테 너는 과분한 친구였던 것 같아. 그런데 그거 알아? 나 아직도 그러고 살아.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 어차피 나는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평생 볼 사람들도 아니잖아?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내는 사람들이 아니꼬운 적도 있어. 최 부장 너도 기억나지? 그 사람이 늘 그랬어. 어딜가나 똑같다고. 우리 회사가 덜한 편이라고. 괴롭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냐고. 다들 그렇게 참고 사는거라고. 그럴때마다 네 생각이 나더라. 너는 분명 최 부장이 말했던 그 ‘다들’ 안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야. 만약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네 흉내를 내며 사무실을 뒤엎었어. 최 부장이 하는 말을 논리 있게, 조목조목 반박하며 꿀먹은 벙어리를 만들기도 하고, 다 고소, 고발해버릴 거라고 소리치며 사직서를 던지기도 했지. 그런 상상을 하며 멍하게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느닷없이 뒤에서 거친 손이 튀어나와 내 어깨를 주무른 적도 있어. 피곤한가봐? 그 친절한 척하는 역겨운 말투가 생생하게 기억나.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아무 행동도 못했다는 거야. 너가 서운할 수도 있겠다. 왜 진작 그런 얘길 하지 않았냐고. 나도 염치는 있어. 어떻게 네 앞에서 회사 투정을 하겠어. 어쩌면 네 앞이니까 그런 얘기를 더 했었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이제 영원히 알 수 없겠지. 편지지를 더 많이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일 숙소에 도착하면 다시 편지 쓸게. 


***

 정아. 방금 막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를 마치고 이 편지를 쓴다. 오늘 몇번이나 이 짓을 시작한 걸 후회했는지 몰라. 천천히 다닌다고 다녔는데 첫날부터 너무 지쳤어.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찼고 늦여름의 햇볕은 아직 뜨거워서 체온 관리가 쉽지 않았어. 당장이라도 내일 일어나면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야. 오히려 그렇게 포기해버리는 게 나을까? 

 그건 아닌 거 같아. 나약한 소리부터 늘어놨네. 나, 생각보다 불평이 많은 사람이었나 봐. 돌이켜보면 나쁘지 않은 하루였어. 바람은 시원했고 햇볕은 따뜻했지. 바닷가를 따라 달릴 때는 정말이지, 마음속에 응어리 진 것들을 조금이나마 날려버리는 기분이었어. 길도 잘 찾았다? 바닥에 칠해진 푸른 선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됐거든. 그런데 갓길을 달리는 건 역시 무서웠어. 덤프 트럭이나 화물차가 지나갈 때면 멈춰서서 기다리고는 했어. 물론 승용차라고 크게 다른 건 아니었어. 한번은 내 자전거가 휘청거릴 정도로 빠르고, 가깝게 지나가더라니깐. 심장이 두근거려서 점심으로 먹은 해물라면이 체한 것만 같았어. 

 용두암에 가서 네가 보내준 사진과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어. 그 구도를 찍기 위해서 너가 어디에 서 있었을 지 상상해봤어. 자전거는 저곳에 세워 두고, 사진을 찍고 나에게 보낸 뒤, 난간에 기대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을 너를 따라해봤어. 용두암은 생각보다 작았고, 바다는 생각보다 예쁘지 않았어. 저 멀리 비행기가 한 대 들어오더라. 사람들은 이곳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계속 오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무지개색 방호벽이 해안을 따라 늘어진 도로를 지났어. 커플이나 가족 그리고 친구끼리 모여 사진을 찍고 있더라. 우리도 한 번 같이 왔다면 참 좋았을 것 같아. 네가 나한테 닥달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 자식하고 헤어지고 난 뒤로, 도저히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 걔가 그리워질까봐 그런 건 아니였어. 오히려 좋은 추억으로 뭉뚱그려 놨던 나쁜 기억들이 생생해질까 두려웠어. 예쁜 상자에 포장해 둔 쓰레기처럼. 언젠가 치워야 할 걸 알면서도, 역해지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방향제를 뿌려가면서. 나는 그게 자연히 없어져 버리거나, 아니면 누군가 치워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라. 그러니 어떻게 내가 너와 함께 이곳에 오겠어. 누구보다도 걔와 만나는 걸 반대했던 너잖아. 처음부터 네가 맞았을지도 몰라. 내가 어리숙하다는 네 잔소리도 맞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알량한 자존심인지, 아니면 오기인지 모를 것을 꺾고 싶지 않았어. 어쩌면 네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 지도 몰라. 너는 자존심이 센 편이었고, 나는 고집이 센 편이었잖아.

 이호테우 해변에서 귀여운 말 등대를 봤어.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너가 했던 포즈를 따라 셀카를 찍었어.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영 부끄러운 게 아니였어. 방파제로 둘러싸인 해변에는 슈트를 입고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모래사장에 가만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그들을 지켜봤어. 조그마한 파도에 올라타 해변으로 밀려오면, 다시 커다란 보드를 들고 바다로 나가고는 하더라. 그리고 또 파도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가고. 지겨운 줄 모르고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는 어린 아이들 같았어. 어느 가을날, 보기 좋게 그을린 너가 상기된 표정으로 서핑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 나는 물도 무서워하고, 수영도 못해서 못 할 것 같다고 했잖아. 걱정 말라며, 10살 언저리 꼬마부터 50살 넘는 노인까지 타고 있었더라며 너가 말했지. 무엇보다도 파도를 한 번 탔을 때의 그 쾌감을 잊을 수 없다고. 그 순간을 추억하던 네 눈동자에서 바다를 보았던 것 같기도 해.  파도를 타는 사람들은 네 말대로 정말 행복해 보였어. 정아. 뭐가 그렇게 놀랍냐는 표정으로, 하얗게 부셔지는 파도를 타고, 네가 내게 와줬으면 좋겠다. 그때엔 나도 주저없이 바다에 뛰어들거야.

이전 02화 신비의 도로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