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덩 Oct 22. 2023

신비의 도로 #4

제주 기담집1

 ***

 정아. 돌아가는 거대한 풍차 아래에 서 본 적이 있니? 서해안을 지날 때 돌풍이 불어 나와 내 자전거는 몇 번이고 휘청거렸어. 서울에서는 태풍이 왔을 때나 불 법한 바람이었지. 이래서 제주도를 바람의 섬이라고 불렀나 봐. 오죽하면 돌로 담을 쌓았겠어? 바람이 만드는 파도는 또 얼마나 거칠까? 섬사람들은 그래서 억세고 강인한가봐. 이 순례를 마치면 나도 그들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도 바닷바람에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어. 그러기에 너무 무겁다면 돌담에 올려 놓고 돌아가고 싶어. 

 풍차는 그다지 유쾌한 소리를 내지 않더라. 우웅, 우웅 거리는 거친 기계소리는 마치 바람이 내뱉는 신음 같았어. 칠판을 손톱으로 긁을 때와 같은 께름칙한 기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요동쳤지. 50m는 넘어 보이는 날개가 내쪽으로 내려올 땐 꼭 나를 덮칠 것만 같았어. 떨어질 것처럼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묘하게 최면이 걸리는 기분이더라. 바닷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풍차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 네가 그토록 좋아했던 협재 바다도 들렸어. 네가 있었던 순간처럼 바다는 여전히 맑고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 이것보라고, 해외여행 갈 필요 없다고 너스레를 떨던 너가 참 바보 같았어. 꼭 비싼 것 마다하고 싼 것만 찾는 우리 할머니 같았다니까. 그렇게 순진한 너에게, 나는 뻔뻔하게도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바다 사진을 보냈지. 더 푸르고, 더 맑고, 더 아름다운 해변이었어. 아기자기한 주황색 지붕들이 늘어선 마을과 돌로 만든 오래된 탑, 그 안에 깃든 몇 세기의 이야기. 지중해의 미풍과 부드럽게 키스하는 햇살과 존재만으로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람들.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와인을, 해산물이 듬뿍 올라간 파스타 옆에 올려 놓고, 이곳저곳 각도를 바꾸며 사진을 찍었는데. 그냥 너한테 자랑하고 싶었거든. 그 해변에서 외로운 사람은 나 뿐인 것 같았어. 바보 같은 너도 한 번은 가봤어야 했을텐데.


***

 정아, 어제는 편지를 쓰지 못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도 너는 믿지 못할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 만난 남자와 잤어. 놀랍지? 네가 항상 유교걸이라며 놀려 댔던 나잖아. 솔직히 나도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 순전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두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에 달아오른 네 모습이 선하다.

 어제 달렸던 코스는 지금껏 가장 힘든 구간이었어. 이제껏 그렇게 경사가 높은 코스는 없었거든. 물론 일반 자전거에 비하면 편했겠지만, 며칠 자전거 탔다고 내 체력이 갑자기 좋아질 리는 없잖아. 결국 자전거에 내려서 끌고 올라가는데, 짐을 실은 자전거는 생각보다 무거웠어. 낑낑대며 땀으로 샤워를 하고 있는데, 누가 경적을 울리는 거야. 설마 하는 마음에 모른 척했지만, 왕복 8차선 도로에 속도를 줄이며 내 옆을 따라오는 차가 경적을 울리는 게 나를 부르고 있다는 건 명백했으니까. 이내 웬 남자가 창문을 열고 말을 걸더라. 행선지가 같으면 태워 주겠다고. 물론 의심과 경계심으로 가득했던 나는 정중히 거절했지. 욱신거리는 허벅지와 엉망이 된 몰골, 땀에 젖어 찝찝한 속옷 때문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던 것도 맞아. 더군다나 그가 말한 목적지도 나와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 차에 탈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았지.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다행히 그 차는 곧 떠났어. 뒷모습을 보니 하늘색이 귀여운 경차더라고. 지붕에는 기다란 서프보드가 올려져 있었어. 순간 조금 후회됐어.  서핑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네가 말했잖아. 처음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빵 터졌었지만, 어쩌면 여행할 때만 겪어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했지. 

 어찌어찌 언덕을 넘고, 긴 도로를 지나 중문에 도착했어. 절벽 위에 카페가 있더라. 땀을 많이 흘린 탓에 허겁지겁 커피를 마셨어. 한숨 돌리고 나니 경치가 눈에 들어오더라. 셀 수 없이 잔물결이 이는 청록빛 바다 위로는 아직 따스하게 빛나는 오후의 해가 만들어 내는 윤슬이 부서지고, 하늘에는 손으로 찢은 솜과 같은 구름이 끝도 없이 흩날리고 있었어. 저 먼 아래 바다 안에서는 물놀이하는 아이들이 작은 개미처럼 꼬물거리고, 커다란 보드 위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이 줄지어 떠 있었지. 잠시 휴식을 취한 나는 해변에 내려가 보기로 했어. 네가 좋아하는 장소를 가고 싶기도 했고, 아까 내게 경적을 울린 남자를 혹시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어. 돌이켜보면 생면부지의 남에게 아무 이유 없이 느꼈던 애틋함은 어디에서 생겨난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타향과도 같은 이곳에서 누군가 말 걸어 준 게 너무 반가웠던 걸까? 몸도 마음도 아무에게나 기대고 싶었을지도 몰라. 

 뜨거운 모래 해변에 앉아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옆에서 누가 나를 불렀어. 물론 나는 그 남자이길 바랐지. 그리고 막연했던 상상이 현실이 되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어.  까맣게 그을린 채로 반바지만을 입고 커다란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있던 그 남자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뭐가 웃기냐고 되물었지. 그러고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어. 그 남자는 꽤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었어. 재치도 있고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도 있는 것 같았어.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지. 아무렴 어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 남자와 삼겹살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어. 관계 후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곯아떨어졌어. 그게 다야. 별일 없었어. 밝은 햇살에 잠에서 깼을 때 그 남자의 그을린 등이 보였어. 새까만 점이 마치 북두칠성처럼 흩뿌려져 있었지. 검지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그 점들을 이어 나갔어. 주문을 거는 기분으로. 거친 피부의 결을 따라서, 그건 꼭 물고기의 비늘 같았어. 점들을 거의 다 이었을 무렵, 그가 졸린 얼굴을 하고 돌아누웠고, 우리 사이엔 다소 어색한 침묵이 흘렀어. 그가 내 머리와 얼굴과 어깨와 허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었고,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안겼지. 그건 분명 나쁘지 않은 섹스였어. 그러나 그 후에 이전보다 더 깊은 침묵이 찾아왔어.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그와 나 사이에 거대한 블랙홀이 있는 느낌이었지. 그러나 그건 의도된, 인공적인 거리감이었어. 얼마 뒤 그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했어. 빤히 쳐다보는 나를 보며 멋쩍게 웃더니, 두시쯤 그 해변에서 다시 보자는 말을 남겼지. 침대 위 빈자리에는 점점 커지는 블랙홀만이 남아 모든 소리를 빨아드리고 있었어. 다리 사이의 저릿한 통증만이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줬어.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방의 구조와 가구가 만들어 내는 소실점들을 응시했다가, 쓰고 나서 버려지지 않은 콘돔을 쳐다봤다가, 네 생각을 했어. 

 어제와는 다르게 바다는 잠잠했어. 물놀이하는 애들은 많았지만 파도는 이상할 만큼 없었어. 바다에 나가 있는 서퍼들은 죄다 보드 위에 누워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지. 간간이 물결이 일었지만 파도가 되지는 않았어. 오지 않을 파도를 기다리는 모습이 딱하기도 했어. 세시가 지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도 파도가 없었기 때문이었겠지. 어찌 됐든 나는 자전거를 가지러 이곳에 돌아와야 했었으니까. 정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다시 만날까 두렵기도 했어. 너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겠지. 제법 멀끔해 보이는 치들이 몇 번 다가와 말을 건넸어. 내가 조금은 매력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어. 혹시 몰라서 유럽에 갈 때 샀었던 원피스를 가져왔거든. 가방 깊숙이 들어 있던 녀석을 꺼내 놓고 몇 번을 갈아 입었는 지 몰라. 혹시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왔을 때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어. 나는 속이 쓰릴 정도의 허기를 느꼈어. 맥도날드에 가서 커다란 햄버거 세트를 두 개나 시켰어. 분명 다 먹을 것만 같았어. 먹어야만 할 것 같았어. 

이전 03화 신비의 도로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