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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22. 2023

신비의 도로 #5

제주 기담집1

***

 오늘 있었던 일을 이 편지에 온전히 담을 수 있을지, 내 기분을 너에게 조금이라도 공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침부터 모든 게 별로였어. 소화가 잘되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고, 페달을 밟을 힘도 좀처럼 나지 않았어. 더군다나 오늘은 이번 여행 중 가장 힘든 코스를 올라가야 했거든. 네가 갑자기 왜 한라산을 향해 달렸는지 원망스럽더라. 아직 투덜거릴 거리가 더 남았어. 1100도로 입구를 지나고 얼마 안 돼서 멀쩡히 해가 떠 있는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근처에는 우비를 살 편의점도 없고, 돌아내려 가기에는 이미 멀리 올라왔었어. 우비보다 더 큰 문제는, 도로가 빗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지. 갓길이 좁아서 차도로 라이딩 해야 했고, 커브도 많았거든. 다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눈앞에 네가 떠올랐기 때문이야. 자전거에 올라타서 뒤로 돌아서는 “그냥 가자!”라고 소리치는 네가. 나는 홀린 듯이 페달을 밟았어.

 심각한 문제는 빠르게 커브 길을 내려오는 차들도, 성가시게 오가는 소나기도, 네가 보이는 내 정신상태도 아니라, 맥없이 방전된 자전거였어. 넋이 나가 있었던 어제 충전하는 걸 깜빡했었거든. 타는 듯한 허벅지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어.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어. 속도가 줄어 자전거가 멈췄을 때,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어. 넘어질 때 바닥을 짚었던 손목이 아렸고, 아스팔트와 자전거 사이에 깔린 다리가 화끈거렸어.  갓길에 자전거를 팽개치고는 주저앉았어. 숲속에 자전거와 짐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어. 그냥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어. 눈물이 차올라 코끝이 매워졌지만, 울기 싫었어. 울어버리면, 내가 너의 자취를 찾아 따라온 지금까지의 과정이 모두 헛수고가 될 것만 같았어. 이제는 나를 안고 등을 다독여 줄 사람도 없을테니까. 그 부재가 선명해질테니까. 그래서 더 서러웠어. 서럽고, 네가 밉고, 그 남자도 밉고, 멍청한 내 자신이 제일 미워서 다시 서러웠어.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어.

 삼십 분쯤 지났을까.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됐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어. 손목과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허벅지를 연신 주물러 댔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따뜻한 바람에 실려 왔고, 비에 젖은 숲이 내쉬는 숨의 비릿한 향기가 코를 타고 가슴을 간질였어. 뒤로는 내리막길이 시원하게 뻗어 있었고, 앞으로는 급커브 길이라 키가 큰 나무들 말고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어. 어쩌면 나는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가야 할 길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자전거를 이끌고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어. 빠른 속도로 차가 지나칠 때는 항상 등골이 서늘해졌어. 저들 중 한 사람이라도, 실수로 혹은 고의로 나를 쳐버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왜 이리도 나약한 건지. 마실 물도 다 떨어졌고 배도 고프기 시작했어.

 커브를 돌고 돌면 다시 끝도 없이 긴 직진 도로가 있었어. 도로를 따라 다양한 나무들이 장벽처럼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영화 효과음처럼 들려왔어. 이따금 고라니의 괴상한 비명도 울려 퍼졌어. 네가 있었다면, 그 울음소리를 따라 해봤을 것 같아. 언제부턴가 나는 지치다 못해 졸리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지만, 정신이 몽롱해져서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어.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나를 향해 올라오고 있더라고. 길을 비켜줄 요량으로 서 있었어. 헬멧, 선글라스, 토시까지 한눈에 보기에도 경력이 대단해 보이는 아주머니였어. 내 옆을 지나갈 때 파이팅, 하고 힘차게 응원해 주셨어. 당황해서 대답도 못 했지. 비슷한 라이더들은 종종 마주쳤었지만, 내게 말을 건넸던 사람은 없었거든. 그런데 씩씩하게 올라가던 그녀가 갑자기 멈추는 거야. 내가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더니, 근처에 휴양림이 있는데 같이 가서 쉬고 올라가지 않겠냐고 물어봤어. 얼떨결에 그러겠노라 하고 우리는 같이 자전거를 끌고 오르기 시작했어. 괜히 나 때문에 걸어가는 건 아닐까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먼저 힘들어서 걷고 싶었다고 말을 해주셨어. 그녀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 휴양림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었어. 우리는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우고,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어. 그녀는 주섬거리며 가방을 뒤지더니 삶은 달걀이며 사과며 간식거리를 꺼내 건넸어. 한사코 거부했지만 나보다 완고하셨어. 어느새 나는 그녀가 건넨 물과 커피까지 마시고 있었지.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는 내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어. 얼굴엔 인자한 주름이 하나둘 늘고 있었고, 땀에 섞인 분 냄새가 희미하게 났지. 그녀는 다정했지만, 동시에 숨길 수 없는 억척스러움이 있었어. 너라면 능청스럽게 농담을 건네며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고심 끝에 라이딩이 힘든지는 않으신 지, 대단하다는 어투로 말했지.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 냈어. 덕분에 나는 그녀가 4대강 종주를 마쳤고, 이번이 제주도 3번째 종주이며, 자신이 속한 동호회에는85세 할머니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지. 

 정아. 그분이 신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나는 다시 눈물이 글썽여서 화장실에 가야 했어. 네가 나이가 들면 왠지 저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을지도 몰라. 어디에서라도 너를 찾아내고 싶은 마음에. 세수를 해도 붉어진 눈시울은 감출 수 없었어. 그런데 제법 그을린 내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더라. 머리는 엉망이고, 몰골은 초췌했지. 자꾸 웃음이 나면서 기분이 좋아졌어. 그건 내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기쁨이었어.

 우리는 목적지였던 1100고지로 향했어. 그분은 내 앞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를 리드하셨어. 연신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셨지. 차가 빠르게 지나갈 때는 나를 위해 공간을 확보하고, 신호를 보내주셨어. 평소의 나라면 분명 부담스러웠을 텐데, 감사할 따름이었어. 놀랍게도,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았어. 다리에선 더 이상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어. 톱니에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부품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어.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졌어.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몸을 부드럽게 훑고 유선형을 그리며 뒤로 흘러 나갔어. 어느샌가 목적지에 다다랐고, 자전거를 세우고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어.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거야. 아주머니가 걱정되는 얼굴로 다가왔을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어.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그녀 때문인지, 그녀의 복실복실한 파마머리가 귀여웠기 때문인지,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 중에 웃긴 모양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안 믿겼기 때문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도 나를 따라 호탕하게 웃어주었어.

 해발 1100m라고 적힌 돌 옆에서 사진을 찍었어. 바로 네가 서 있었던 장소에서. 웃기는 건, 내가 다녀온 어떤 곳에서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는 거야. 언제나 카메라 앞에 서면 어색함에 웃지 못하는 나 였잖아. 졸업사진 찍을 때 기억나? 사진 기사님은 짜증을 내며 나를 보내려고 하고, 너는 옆에서 한 번만 더 찍어 달라고 고집을 부리고,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경련이 나고 있었잖아. 얼마나 도망가고 싶었는지 몰라. 예쁘게 나온다고 안 해보던 화장을 하고, 고데기를 하고, 눈썹을 그리던 그때보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자전거에 기대서 하얀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내가 더 잘 나온 거 있지. 집에 돌아가면,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 있는 우리 둘의 사진을 하나의 액자에 걸어 놓을 거야.

 아주머니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했어. 섬 종주를 마무리한다고 하셨거든. 나는 반대편으로 내려갈 예정이었고. 우리는 다소 어색한 작별 인사를 나눴어. 그녀는 내 어깨를 두드려 줬지. 내려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어. 오히려 가슴이 너무 벅차올라서 문제였지. 속도가 너무 빨라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나는 속도감을 즐겼어. 고생했던 하루의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어. 더는 갓길에 치우쳐 가며 가슴 졸이지도 않았어. 맞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나를 뒤흔들어 놓을 생각은 아니었어. 오히려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바람의 언어로.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 바람도 자전거도 너도. 걱정하지 마. 말은 이렇게 해도 누구보다 조심해서 내려왔으니까. 봐. 멀쩡하게 편지를 쓰고 있잖아.

 내리막길의 끝 무렵, 도로에 차를 세워 놓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보였어.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 둘과 부모였어. 위험하게 차도에서 뭘 하는 건지 의아했는데, 음료수 캔을 굴리고 있더라고. 그제야 그 터무니없는 장소가 어딘지 기억났어! 우리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왔을 때, 도깨비 도로에 들렀던 거 기억나?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버스에서 지쳐버린 나는 도무지 나갈 기분이 아니었는데, 네가 나를 끌고 나갔었잖아. 나는 별로 신기하지도 않았어. 호들갑 떠는 것도 보기 싫었고, 무엇보다도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그 착시현상도 내게는 보이지 않았거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에 납작 엎드려 소리치던 네가 떠올라. 정아. 나는 이제야 네가 봤던 오르막길이 보여. 그런데 신비한 일이 일어났어. 페달을 밟지 않아도 속도가 자꾸만 빨라지기 시작한 거야. 물론, 실제로는 ‘약간’ 내리막길이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분명 일반적인 내리막길을 달릴 때와는 달랐어. 뭐랄까. 그네에 앉은 내 등을 누군가 밀어주는, 애정이 담긴 장난 같았어.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나는 부드럽게 나아갔어. 정아. 그건 정말 멋진 경험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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