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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Jul 20. 2021

2개월 만에 되돌아 온 수표 한 장..

오늘, 문득 그날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1991년 8월 6일은 딸아이가 태어난 양력 생일입니다. 30년 전, 딸아이는 출산예정일인 8월 15일보다 10여 일이나 앞당겨서 세상에 왔습니다.

그날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님께서 모처럼 바쁜 농사일에서 잠시 일손을 놓으시고, 동네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과 관광버스를 대절을 하여 서울의 63 빌딩과 청와대 앞, 판문점 등 서울 곳곳을 여행하러 오신다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울 삼전동 반지하의 2칸짜리 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여관에서 주무실 아버님을 꼭 저희 집에 모시고 와서 따뜻한 식사도 대접해 드리고, 주무시고 갈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에 며칠 전부터 여러 종류의 김치와 밑반찬을 준비하느라 나름 분주했습니다. 하루 전날에는 육개장을 끓인다고 남산만 한 배를 안고 동네 시장으로 부엌으로 종종걸음을 쳤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난 그날 아침, 평소처럼 눈을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앉히고 나서 아무 진통도 없이 갑자기 하혈이 시작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당황한 마음에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친정 큰언니께 전화를 했더니 빨리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오전 9시, 항상 다니던 동네 산부인과에 그날 첫 환자로 접수를 하자마자 그때부터 서서히 진통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28살 늦은 나이의 초산이므로 늦은 저녁이 돼서야 해산을 할 것 같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그때는 왜 그리 두렵고 불안하기만 했는지요.

병원에 입원을 하고 나서야 남편은 비로소 시댁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님은 이른 새벽에 일행들과 서울을 향해서 출발하셨다는데, 혈압이 높은 어머니께서 걱정을 하실까 봐, 작은 며느리가 산부인과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진통은 차츰차츰 빨라지고 그 강도가 심해지면서 외갓집에 가셨다는 친정엄마를 저는 낮은 소리로 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모릅니다.

'엄마는 이렇게 우리 열두 남매를 다 낳으셨구나… 그것도 나처럼 병원도 아닌 집에서 다 낳으셨구나….'

그 순간, 12남매를 낳은 엄마께서 한없이 위대해 보이고, 제 곁에서 저의 손을 잡아만 준다면 아무리 심한 진통이 와도 쉽게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이른 시간인 오후 2시 30분쯤, 저는 3.8kg의 건강한 딸아이를 분만실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임신기간 내내 입덧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딸아이는 생각보다 무척 건강했습니다.

회복실에서 꼼지락거리는 딸아이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이 아기를 아무 탈없이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쓸어내리면서, 우리가 엄마와 딸로 이 세상에서 만났지만 친구처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그런 사이로 잘 지내자고요.

그럴 즈음 서울에 관광을 오신 아버님께서 남편과 연락이 닿아 병원으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무리 저희 집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남편의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갔다고 하여 함께 온 일행들과 헤어져서 택시를 타고 부랴 부랴 달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외손주와 외손녀들만 있었을 뿐, 친손녀는 당신 생전에 처음이었던 아버님께서는 출산 후 심한 하혈로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저에게 "수고가 많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께 우리 집에서 따뜻한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던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 까닭에 "아버님, 죄송합니다" 하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워낙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과묵하신 아버님은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저에게 주시면서 "병원비에 보태거라" 하셨습니다. 서울로 관광을 오시는 길에 출산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며느리에게 병원비로 주려고 미리 준비를 해 오신 듯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일행들에게 돌아가신 후, 편지봉투를 열어 본 저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한쪽에 찡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봉투 속에는 10만 원짜리 수표가 한 장, 그리고 만 원짜리 현금이 20만 원, 도합 30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10만 원짜리 수표는 2개월 전 제가 시댁에서 아버님께 용돈 하시라고 드렸던 수표임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습니다.


딸아이를 임신하고도 직장생활을 했던 저는, 임신 8개월째 접어들면서 출산을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여름휴가 기간과 출산예정일이 비슷한 시기였기에, 어쩌면 휴가 때에 시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할 것 같아서, 서울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7시간도 더 가야 하는 경남 함안에 있는 시댁에 가서 혼자 일주일을 보내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무거운 몸으로 홀로 시댁에 내려간 저에게 어머님은 아버님께서 며칠 전부터 내내 저를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6월 초였던 그때, 저는 시댁에서 모내기하는 일을 주변에서 거들기도 하고, 집 뒤 텃밭에서 마늘 캐는 일도 하면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빨리 흘러갔습니다.

시댁을 출발하기 앞서 시댁 마당에서 서울 동네 은행에서 미리 인출해 간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아버님, 용돈으로 쓰세요"라면서 아버님께 드렸습니다.


그때 아버님은 웃음 띤 얼굴로 "며느리 돈이 많네…"하셨는데, 그 수표가 2개월 후 저에게 다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며느리가 드린 용돈조차 아끼고 아껴, 거기에 당신 돈을 더 보태 병원비로 전해 주신 아버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따뜻한 사랑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 후 저는 시댁과의 사소한 일로 서운한 일이 있을 때면, 저에게 다시 돌아온 그 10만 원짜리 수표를 기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웬만큼 서운한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린 작은 마음에 더 보태어 저에게 병원비로 다시 되돌려 준 시부모님들의 따뜻한 마음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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