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태어나고 자라던 고향집 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철길을 넘어 오른편으로는 용정리 밭이 있고 왼편으로는 삭실 방죽과 아리랑고개가 있었습니다.
오른편은 용정리밭, 왼편으로는 삭실방죽과 아리랑고개가 있습니다.
용정리 밭과의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밭을 산 이후로 시작되지만, 삭실 방죽과 아리랑고개의 추억은 용정리 밭보다 훨씬 이전부터 많은 추억이 서린 곳입니다.
봄이라고 하기에 이른, 쌀쌀한 겨울 날씨가 피부로 느껴지고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논둑 여기저기에 남아 있어도 소쿠리를 옆에 끼고 봄나물을 캐러 다니던 곳도 삭실 방죽 언저리였고, 들판에 누런 벼들이 황금물결을 치기 시작할 때면, 국수 버섯, 싸리버섯, 꾀꼬리버섯을 따러 아리랑고개의 산속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정리 밭의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고 나면, 엄마는 아리랑고개로 겨울 동안 땔나무를 하러 다니셨습니다.
그 시절 우리 집 안방에는 연탄을 때기는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연탄을 때면 꼭 어른 엉덩이만큼만 아랫목이 따뜻했습니다.
아버지 엉덩이만큼만 따뜻한 방... 아마 고래가 막혔나 보다고 했지만, 워낙 가정적이지 못한 아버지는 안방에 구들장을 고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가마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에 엄마는 톱밥이나, 왕겨를 사다가 불무를 돌려가며 밥을 지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이웃을 따라서 아리랑고개로 땔나무를 하러 갈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나무 밑에 쌓여 있는 낙엽들을 갈퀴로 긁어모으거나, 소나무의 죽은 가지인 삭달가지(삭정이)를 뚝뚝 잘라내어 집으로 나무 한동이를 머리에 이고 와 그 나무로 불을 때어 밥을 짓는데, 그렇게 화력이 활활 붙어서 좋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 후부터 엄마는 가을걷이가 다 끝난 이후부터는 겨울 내내 삭실 방죽을 지나 아리랑고개 근처로 땔나무를 하러 다니셨습니다.
아직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저에게 미리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거든 아리랑고개 어디 어디로 찾아오너라 하시던가, 아니면 마루에 삐뚤빼뚤 소리 나는 대로 아리랑고개 어디로, 또는 진등의 삼 형제 바위 있는 곳으로 오너라~하고 쪽지를 남겨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의 말씀대로 삶은 고구마 등을 싸 들고 아리랑고개 근처로 엄마를 찾아갔습니다.
남원으로 가는 신작로를 가로질러서 삭실 방죽을 지나 엄마가 이야기하던 장소에 도착해서 "엄마~~"하고 부르면 이때쯤 제가 오리라 생각하신 엄마는 약속 장소 근처에서 갈퀴로 솔잎을 긁어모으다가 "오냐~~ 여기다..." 하곤 했지요.
엄마가 내내 긁어모은 솔잎을 한 곳에 모아 놓으시고는 좀 더 햇볕에 말리느라 쫘악 펴 놓으시고는 다른 장소에서 갈퀴로 긁어모은 솔잎을망태에 담아 오시곤 했습니다.
싸 가지고 간 고구마를 김치 한 조각과 드시기 전에 꼭 "고수레~"하면서 풀숲으로 고구마 조각을 던지던 엄마...
저는 갈퀴질보다는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삭달가지(삭정이)를 부러뜨리거나, 오래전에 소나무를 베어 내어 그 밑둥이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푹 썩어서 발로 밀어 뜨리면 그대로 그 뿌리가 뽑혀 나오는 고자배기(오래된 나무의 밑둥치, 그루터기)를 여기저기 찾아다니기도 했지요.
지금이야 산불방지를 위한 입산금지를 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자꾸만 나무를 해 가는 통에 헐벗은 산이 된다고 나무를 못하게 하려는 이유로 입산금지를 했었지요.
산지기들이 나무를 못하게 단속을 하였기에 엄마는 단속을 하지 않는 산을 찾아다니거나, 아니면 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무를 해야 했습니다.
해가 짧은 겨울날이지만 아리랑 고개 산속의 밤은 유난히 빨리도 찾아왔습니다. 어둑어둑해지기 전이면 엄마는 그동안 긁어모은 솔잎과제가 따 모은 삭정이와 고자배기를 한데 모아 나무동이를 만들었습니다.
엄마가 머리에 이고 오실 나무동이는 유난히도 컸었고, 제가 이고 올 나무동이는 훨씬 작았지요. 어떨 땐 제가 메고 가도록 해 달라고 하면, 엄마는 새끼줄을 양쪽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나무동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엄마보다 앞장서서 나무동이를 머리에 이거나 혹은 어깨에 짊어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 어둑해진 삭실 방죽 옆을 지나올 때에도 엄마가 뒤를 따라오시는 까닭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작로도 건너고 좁은 오솔길 같은 논둑을 지나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면 왜 그리도 마음이 포근하고 따뜻해져 왔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 집 뒤꼍에 엄마가 해 오신 나무동이들이 하나 둘, 쌓여 가면 엄마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마음이 뿌듯하다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지 않는 까닭에 나무를 하러 산에 갈 이유가 없지요. 그 시절에는 밥을 짓기 위해서 그리고 겨울 동안 따뜻한 난방을 위해서는 꼭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었습니다.
2013년 2월 17일 엄마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매주 토요일이면 엄마가 다니시던 원불교 산서 교당에서는 7차례의 엄마의 천도재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천도재를 마치고 나면 엄마의 산소에 들렀다가,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나무를 했던추억을 찾아 진등의 삼 형제 바위, 아리랑 고개, 삭실 방죽의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35년의 세월이훌쩍지나버린 까닭에제가 생각했던 아리랑 고개와 삭실 방죽, 삼 형제 바위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엄마 생신날 아침에 쓴 시
- '어머님께 드립니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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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새들 발자국 어지럽고 별이 하나 둘 잠 깨던 숲 속 가시덩굴 헤치며 나무동이 머리에 이고 높고 험한 아리랑고개 넘어 올 적엔 소쩍새는 피맺힌 한을 울음으로 토하고 달빛도 당신 발길에 차여 파랗게 멍들어 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