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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Mar 08. 2019

마중물

2015년 3월, 31회 3.15 의거 기념 전국 백일장 산문 장원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시절, 어스름 새벽빛이 가만가만 창문을 비출 때, 어김없이 마당 한편에서 하루를 깨우는 펌프질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오늘도 어젯밤에 남겨놓은 마중물 한 바가지를 부어 제일 먼저 퍼 올린 물 한 사발을 부뚜막 위에 모셔두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새벽 기차를 타고 100리 길 통학을 하는 아들들을 위해 서둘러 기도를 마치고, 보리쌀 한 됫박 쓱쓱 씻어 가마솥에 안쳐, 삭달가지 뚝뚝 끊어 아궁이에 불 지필 때면 아마도 어머니는 조금 전 서둘러 끝내버린 기도를 쉼 없이 활활 태워 올렸을 것이다.

 

어머니의 거친 손으로 쓸고 닦아 자르르 윤기 흐르는 가마솥 가장자리로 밥물이 포르르 넘쳐 부뚜막을 적실 때도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가만히 잦아들며 뜸을 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서독에 광부로 돈 벌러 간 큰 아들, 월남에 파병 간 둘째 아들, 빛바래고 무릎이 나온 코르덴 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대학교를 다니는 셋째 아들, 그리고도 두 손으로 셀 수 없는 자식들.

 

자식아, 내 자식아. 부디 몸 건강하거라. 부디 살아오너라.

 

남들보다 몇 배 많은 열두 자식을 위해 어머니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고, 기도 속에서 하루를 마감했으리라.

 

그렇게 어머니의 하루는 새벽 펌프질 소리로 시작되고, 다음날 새벽 펌프에 부어질 마중물 한 바가지를 남겨놓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토록 열심히 살았건만, 어머니의 삶은 너무나 고되고 힘이 들었던 것일까?

 

그 시절 고향에서는 지금처럼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화전놀이를 갔었다.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마을 사람 모두가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가서 풍악을 울리며 즐겁게 놀다 오던 화전놀이.

 

그때 어머니도 화전놀이를 다녀와 술 한 잔에 취해서 안방에 누워 양쪽 팔에 나와 막내인 동생을 팔베개하고 누웠다. 어머니는 길게 한숨을 토하며 조용히 숨죽여 우시더니 나중에는 흐느껴 우셨다.

 

“내가 너희 둘만 있다면 이렇게 옆구리에 끼고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구나. 그러나 열두 자식을 두었으니 그럴 수도 없구나.”하시고 하염없이 우셨다.


그때의 나는 철이 없어서 어머니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가 마냥 싫기만 했었다.

 

이제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어머니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새벽 펌프질로 물을 길어 부뚜막에 정안수 한 그릇 떠 놓고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던 모습, 다음 날 아침에 펌프질을 하기 위해 마중물을 남겨놓던 모습, 화전놀이 다녀와서 흐느껴 우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시절,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열한째와 열두째를 가슴에 안고 우셨을까?  그렇게 온갖 정성을 다해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기도 속에서 하루를 마감하고도 풀리지 않을 만큼 고되고 힘들었던 삶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펌프, 그 자체를 우리 생활 속에서 찾아보기도 어렵다. 가끔 어느 식당에서 인테리어 용품으로 설치된 장식용 펌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마중물이라는 단어도, 그 의미도 알지 못하는 청소년이나 젊은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날의 풍요로움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중물로 사용했던 세대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 또한 작게는 나의 아이들을 위해, 내 주변의 이웃을 위해, 좀 더 크게는 이 사회를 위해 무언가 보탬이 될 수 있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되도록, 하루하루를 깨어있는 사람으로, 어른으로 잘 살아가도록 해야겠다.

 

하얀 눈길에 남겨진 나의 발자국을 보고, 누군가 뒤따라 올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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