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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Mar 04. 2022

친정엄마 생애, 마지막 투표

92살 불편한 몸으로 투표했던 엄마...

1921년에 태어나서 지금 살아계신다면 올해로 102살인 우리 엄마. 18살 나이에 한 살 아래인 아버지와 혼인을 해서 20살 나이에 첫 딸을 낳았는데, 생기는대로 낳다 보니 딸, 아들, 딸, 아들, 아들, 아들, 딸, 딸, 딸, 아들, 딸, 딸. 5남 7녀 12남매를 낳으셨다.


엄마의 학력은 무학.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국민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지만 집에서 '숙영낭자전'을 필사를 하면서 언문을 깨쳤기에 글을 읽고, 쓰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한문공부를 하지 못해서 1980년대의 신문들은 한문과 한글이 혼용된 세로줄 기사였기에 엄마는 신문 읽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던  1988년 5월 15일, 해직 기들과 민주시민들의 협조로 창간된 한겨레신문은 한문 없이 오로지 한글 기사와 가로줄이라서 읽기에 편하다는 이유로 엄마는 단번에 한겨레신문 애독자가 되었다.


1980년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학생들의 데모하는 모습을 언론 통해서 접한 많은 사람들은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데모만 한다'라고 비난을 할 때도, 엄마는 한겨레신문을 읽는 까닭에 '학생들이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저렇게 데모를 한다'라고 하면서 학생들의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속에서 데모를 하다가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될까 봐 항상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5남 7녀, 12남매를 낳고 키우시느라 한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엄마는 항상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그 기도는 언제나 자식들의 무병장수와 소원성취를 빌고는 했다.


그러나 엄마는 새벽기도를 시작할 때마다 자식들을 위한 기도보다 먼저 이야기를 하는 기도가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세계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다음으로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이야기하면서 기도를 했다.


언제인가 친정집을 방문한 나는 매일 새벽이면 2시간 동안 이어진다는 엄마의 새벽기도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탄핵을 당해서 대통령의 업무가 중지되고 있던 때였다.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나의 귀에 엄마의 새벽기도가 들려왔다. 세계의 평화와 남북의 평화를 위한 기도 끝에 엄마는 '하루빨리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에서 벗어나서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동안은 노무현 대통령이 나이가 젊은 대통령이어서 대통령을 5년에서 끝내지 말고 5년 더 일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2번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5년간의 대통령 역할만이라도 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엄마의 그 기도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엄마는 2013년 2월,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엄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는 2012년 12월 4일이었다.


그때 엄마는 몸이 많이 불편해서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있는 친정집을 떠나 경기도 수원의 요양원에서 2개월 동안 생활을 하다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고 생각을 한 엄마가 언니, 오빠들을 졸라서 친정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을 때였다.


엄마는 여전히 다리가 불편해서 예전처럼 걸을 수 없었지만, 앉은 채로 안방과 거실, 거실과 화장실을 다니면서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양원에서 친정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만나러 나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친정집을 찾아갔다. 그날 저녁에는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선거를 위한 대통령 후보들 간의 첫 번째 TV 토론이 있었다.


TV토론을 보면서 "엄마~ 이번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거지?"하고 묻는 내게 엄마는 "이번에는 투표하러 안 갈란다. 내가 다리가 아파서 혼자서는 도저히 투표소에 못 갈 것 같다." 하시는 거였다.  그때 옆에 있던 요양보호사가 엄마가 투표를 하시고 싶어 하면 자신이 차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그 다음 해인 2013년 2월 17일, 엄마는 요양원에서 친정집에 다시 돌아온 지 100일을 채우지 못하고 93세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고 친정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이런저런 대화 끝에 둘째 오빠가 어떻게 알았는지, 요양보호사가 몸도 불편한 엄마를 모시고 투표장에 갔다  왔다고 싫은 소리를 했다.


그때 나는 둘째 오빠에게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오빠! 그것은 제가 몸이 불편해서 투표를 망설이는 엄마에게 엄마의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지 말고 꼭! 투표를 하라고 말씀을 드렸고, 요양보호사에게도 부탁을 했어요. 그러니까 요양보호사에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2012년 12월 19일. 건강하지 못한 불편한 몸을 이끌고 92살 나이에 당신의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행사했던 우리 엄마.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2022년 지금.  몸이 불편해서 요양보호사의 도움이 필요했던 엄마에게 '엄마의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지 말고 꼭 투표를 하라'라고 했던 것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 많은 분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아주 간절하게.


"당신의 소중한 한 표를 부디 포기하지 말고 꼭! 투표하세요."



3월 9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사전투표를 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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