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의 멘토가 된 엄마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 삶에 선한 영향력을 주었던 친정엄마

by 한명라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함부로 이리 저리 걷지 말라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따라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위의 시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웰다잉 강의를 할 때 즐겨 사용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물질적인 재산을 하나라도 더 물려주기 위해 안 입고, 안 먹고, 안 쓰면서 애를 쓰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모가 백 마디 말보다는 행동으로 올바른 길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자식들은 부모님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라 바르고 옳은 길을 따라간다고 이야기를 하면, 적지 않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저의 엄마께서 큰오빠의 등록 마감시간 30분 이후 도착으로 큰오빠를 끝내 대학교를 보내지 못하면서 깨우친, 배움에는 다 때가 있기 때문에 그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엄마의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을 삶을 스스로 개척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60대 중반쯤 되었을 친척의 이야기입니다. 삼계면 봉현리 큰집의 바로 앞집에 살고 있는 이 친척은 저보다 나이는 6, 7살 위였지만 촌수가 저보다 낮아서 조카뻘이었습니다. 그때 고향에서는 촌수가 위인 여자에게는 아짐, 남자에게는 아재라고 불렀습니다. 저를 아짐이라고 불러야 하는 그 친척은 나이가 한참 위여서 언니라고 부를 수도 없고 반말하기도 부담스러웠던 친척이었습니다. 그 친척에게는 남동생도 여럿이고 여동생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집안에서 첫째인 자신을 국민학교만 졸업을 시키고는 중학교 진학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 동안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단식 이유는 자식을 낳았으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자신을 중학교에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카의 단식투쟁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 아버지는 "그년이 천하에 독하고 고집이 센 년"이라고 욕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그 조카의 부모님은 딸의 단식투쟁 끝에 중학교에 진학을 시켰습니다. 그 조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간호학원을 다니면서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을 압박을 해서 남동생, 여동생들도 고등학교를 졸업시키도록 했습니다.


훗날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조카가 자신을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단식투쟁을 하게 된 이유에는 시댁 식구들의 모진 압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큰딸을 약대에 보내는 오수 할머니(우리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을요.


오수 할머니는 그 많은 자식들, 그리고 딸을 대학교에도 보내는데, 오수 할머니보다 한참이나 젊은 자신의 부모님이 집안의 첫째인 자신을 중학교조차 보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단식을 하면서까지 중학교 진학을 쟁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들도 고등학교까지 보내도록 했습니다.


몇 년 전 우연하게 알게 된 그 조카의 소식은 고향 근처의 보건소에서 상당히 높은 직급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 조카가 부모님의 바람대로 국민학교만 졸업을 했다면 결코 보건소에서 그 직급으로 근무할 수 없었을 겁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저의 국민학교와 중학교 동창이었던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는 고향의 우리 동네에서 커다란 냇가를 건너 위치한 시장통에 사는 친구였습니다. 국민학교 때에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키가 비슷해서 짝꿍도 했던 친구였습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는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할 처지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경상남도 마산에 한일합섬 내에 한일여고가 있는데 그 학교에 합격을 하면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친구는 한일합섬과 한일여고 두 곳을 동시에 시험을 치기 위해서 마산에 다녀왔습니다. 시험 결과는 한일합섬 회사는 합격을 했는데 한일여고는 불합격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중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 친구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흘러서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 친구가 고등학생인 우리들과는 다른 화사한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있었던 일도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신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말을 하면 너무 멀고 낯선 마산으로 보내 줄 것 같지 않아서 소리 소문 없이 마산에 있는 한일합섬에 취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한일여고에 입학을 해서 낮에는 한일합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한일여고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당시 부모님께 필요할 때마다 돈을 타 쓰는 학생 신분인 우리들보다 돈을 직접 버는 그 친구는 옷차림도 세련되었고 돈을 쓰는 씀씀이도 달라서 우리들에게 하드(아이스크림)도 사 주고 했습니다.


또 시간이 몇 년이 지나서 제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1987년 늦가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고향을 방문했다가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시장통에 있는 친구에 집에 들렀습니다. 마침 집에 있던 친구의 어머니는 그 친구는 마산에서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위(친구의 남편)의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너무나 독특한 이름이어서 한번 들었는데도 저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을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결혼을 하게 되었고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1993년 3월, 시댁이 가까운 마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이사를 온 이후 어느 정도 주변이 안정이 되면서 마산에 살고 있다는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졌습니다. 친구 남편의 독특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저는 집에 있는 전화번호부에서 그 이름을 찾아보았습니다. 독특한 친구의 남편과 같은 이름이 3명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남자가 아닌 여자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이름이 000 아니세요?" 그랬더니 "내가 000 맞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산 산호동에서 홈패션 용품 가게를 하고 있다는 친구에 말에 저는 두 아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는 딸만 둘을 두고 있었습니다. 한일합섬을 다니면서 재봉틀로 이불 등을 만든 솜씨로 홈패션 용품 가게를 운영을 하고 있었고, 복지관에 홈패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모르게 고향을 떠나 오게 된 배경에는 바로 우리 엄마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에서 커다란 냇가를 건너 옆동네에 살고 있는 우리 엄마는 자기가 보기에 자식이 열두 명이나 되는 데도 아들 딸 구별 없이 대학교도 보내고 고등학교를 보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도 보다 훨씬 젊은 자신의 부모님은 7남매인 자식들 교육에 힘을 쓰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두 오빠와 언니 모두 중학교만 보내고 그만이었고, 자기도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아서 자기 힘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 스스로 낯설고 먼 마산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 후 자신의 남동생들과 여동생은 부모님을 다그쳐서라도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또 친구는 자기는 비록 딸만 있지만, 그 아이들이 원한다면 서울에 있는 대학교라도 보낼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열두 남매를 교육시키는 너희 엄마는 본받을 만큼 대단하다고 자신의 부모님께도 몇 번이나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꼭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길을 올바르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요.


우리 엄마는 열두 명의 자식들을 낳고 가르치느라 '호랑이가 열두 번 물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을 뿐인데도, 엄마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우리 엄마는 알기나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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