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온 외손자의 편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외손자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by 한명라

나에게는 열두 명의 자식들과 30명의 손자, 손녀들이 있습니다. 30명의 손자 손녀들 어느 누가 소중하고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그 손자 손녀들 중에 내 나이 57살에 둘째 딸의 둘째 딸(외손녀)이 어린나이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요. 그리고 2008년 내 나이 88살에 셋째 아들의 아들(손자)이 26살 나이로 골육종이라는 병명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존하고 있는 손자 손녀가 28명이지만,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외손녀, 손자도 나의 자손이기에 30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열두 자식들 낳고 키우고 가르치느라 바빠서 나는 손자, 손녀들을 직접 돌보거나 키워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딸의 두 아들(외손자)을 내가 키워 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넷째 딸은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던 1986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넷째 사위는 전라북도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넷째 딸은 신혼살림을 전주에 있는 시댁에 차렸지만, 지방으로 전근을 가는 것을 망설여서 결혼 후 안양에 있는 우리 집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동생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주말부부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나는 넷째 딸에게 결혼 후에도 계속 직장생활을 하도록 했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동안 1987년에 첫째 외손자가 태어났고, 1988년에는 연년생으로 둘째 외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넷째 딸과 한집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외손자를 내가 돌봐 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두 자식 중에서 유일하게 넷째 딸의 두 외손자를 키워 주고 어린이 집에도 보내던 중, 넷째 딸은 주말부부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자 전주로 전근을 가겠다고 신청을 하여 두 외손자들과 전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결혼을 하지 않은 자식들과 안양에서 살던 나는 열두째인 막내딸마저도 결혼을 시키고 나서 2000년에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있던 낡은 친정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신축하여 안양에서 이사를 했습니다.


넷째 딸 가족이 살고 있는 전주에서 내가 살고 있는 산서면 오산리 우리 집은 자동차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깝습니다.


넷째 딸은 주말이면 넷째 사위, 두 외손자와 함께 자주 나를 찾아오고는 했습니다. 두 외손자도 어린 시절 내가 키워 주었다는 기억을 잊지 않고 있어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얼마나 마음으로 위하던지요. 넷째 딸 가족은 우리 내외와 함께 경치 좋은 여러 곳으로 자주 여행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자식들보다 이런저런 즐거운 추억이 많습니다.


그런 넷째 딸 가족이 2003년 5월에 시댁 식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넷째 딸이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외손자들과 이민을 간다고 했을 때 이제는 자주 만날 수 없다는 서운한 마음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할 수 도 없는 일 아닙니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 자주 만나지 못할 거라는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넷째 딸과 넷째 사위, 큰 외손자는 자주 한국으로 와서 반가운 얼굴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만 둘째 외손자는 이민을 떠난 지 9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마음 한편으로는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2012년 8월 어느 날 태풍이 지나간 후, 나는 우리 집 뒤꼍에 있는 아궁이에 쓰레기를 태우다가 쓰레기 더미에 섞여 있던 에프킬라 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두 다리와 두 팔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때 화상 치료를 위해서 친정 조카의 도움으로 전주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입원을 한 지 4주가 지나서 화상을 입은 상처는 어느 정도 치료가 되어 며느리들의 도움을 받아 퇴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더 이상 나 혼자서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병원에서 두 명의 간병인의 도움을 교대로 받으면서 병실 침대에만 누워 있던 나의 두 다리 근육이 모두 소실되어 혼자 힘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몸상태로는 혼자서 일상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나는 스스로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2012년 9월 친정집에서 추석을 지내고 나는 자식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나의 자식들은 수원의 요양원에서 생활을 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때 나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200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넷째 딸의 둘째 외손자가 마침 한국에 나오는 아버지(넷째 사위) 편에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행여나 할머니 눈에 보이지 않을까 봐 큼직 큼직한 손글씨로 3장의 종이에 편지를 썼습니다.


이민을 떠난 지 한 번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외손자입니다. 이제 이민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2013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외손자의 편지가 너무 고마워서 요양원으로 면회를 오는 사람들마다 보여주며 자랑을 했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2013년 2월 17일, 내가 93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 장례식을 마친 후에 여섯째 딸(열한째)이 친정집 안방에서 발견을 하고 자신이 보관을 하겠다고 가져갔습니다.


그 편지를 소개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할머니,


안녕하세요.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자란 손주 형재예요. 제 기억의 가장 오랜 조각을 떠올리면 안양에서 숱하게 본 천장의 나무 무늬가 떠 오르네요. 저의 탄생부터 형과 저를 고생하시며 기르신 할머니,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제가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지만 할머니의 끊임없는 노고와 온정이 흘러넘쳐 열두 분의 어머님 남매 모두를 바로 세우셨고, 그 희생하심을 대를 넘어서 제가 받았고, 힘든 미국 생활을 견딜 힘을 더해주셨어요.

언제나 할머니껜 품속의 갓난아기일 저는 이제 주립 과학고를 졸업한 후 학업에 욕심이 많아 전공 세 가지를 수료하고 수석으로 주립대를 졸업했어요.


이 모든 게 할머니께서 주름을 이마에 한 줄 더하고 저와 형을 위해 닳으심을 사리지 않으시며 따스한 보호로 우릴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테지요.


간혹 더 노력하고 더 높은 곳을 가야 하는 이유가 할머니와 저의 부모님의 노고에 대한 최소의 답례라는 생각이 들고, 행여나 그 크신 사랑에 부족하진 않았나 언제나 점검해봅니다.


할머니, 저는 졸업 후 부모님이 계신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차로 다섯 시간 떨어진 워싱톤에 위치한 미국 중앙은행에서 경제연구원 일을 하고 있어요. 매일 한 시간도 마음을 편히 쉬게 할 수 없는 일상이지만 저의 부모님과 할머니 덕에 아무 탈없이 공부하고, 온전하고 건강한 육체를 받고, 제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경제 연구만을 녹봉을 받으며 매일 한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스럽습니다.


힘든 관문마다 가족들을 위해 너무 초인적으로 근면하시고 부처보다 인자하신 할머니를 떠올리면, 부끄럽기도 한 저의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 존재이신 할머니, 너무 연락도 없었고 방문도 전무했던 손자를 용서하세요.


너무 어린 나이에 할머님의 보답을 요구치 않던 깊은 사랑을 받아 당시엔 전하지 못했지만 지금 제가 확실히 아는 것은 저희 어머니, 어머님 형제분들, 또 저와 형을 위해 더 허리 굽으시고 닳아지셨던 할머니가 제 생에 가장 큰 영웅이자 은인이라는 거예요.


언제나 햄버거나 빵만 먹으니 할머니께서 언제나 차려주시던 두릅나물과 갖 지은 쌀밥이 그립네요.

몸 건강하시고 내년엔 제 상황이 어떻든 무조건 찾아뵙겠습니다. 아직도 미국 떠나기 전 할머니께서 우리 가족을 위해 새벽 두 시간 기도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 덕에선지 우리 가족은 너무 다들 건강하고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2012년 9월 28일

할머니께 진 영원한 빚으로 살아 숨 쉬는

손자 임 형재 올림




왼쪽의 손자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