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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Dec 11. 2020

"엄마는 왜 아버지랑 결혼을 했어?"

가정에 무심했던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했던 엄마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그때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나는 여전히 집안 살림과 자식들 교육에는 나 몰라라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컸기에 무남독녀 귀한 딸을 아버지와 혼인을 시킨 외할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마음이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엄마는 왜 아버지하고 결혼을 했어? 엄마를 그렇게 애지중지 귀하게 키웠다는 외할아버지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어쩌자고 아버지 같은 사람한테 엄마를 시집을 보냈대?"하고 엄마에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는 "나를 혼인시키기 전에 여러 혼처가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찾아가서 물어보는 점집마다 하나같이 우리 집(외갓집)에서 서쪽 방향에 사는, 나이가 한 살 아래인 사람(아버지)이 천생연분이라고 꼭 그 사람하고 혼인을 해야 한다고 했다더라."


그렇게 대답을 하던 엄마의 얼굴 표정이나 말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불만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아버지하고 살면서 아버지가 차라리 우리들 곁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너희 아버지가 속 못 차리고 술 마시고 노름하고, 평생 한 달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게 하고, 그 많은 자식들 대학교를 보내도 아예 모르는 체하고 힘들게 했어도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왜?"


"그래도 너희 아버지가 번듯하게 농협을 다니고 있어서 내가 덕을 많이 봤다. 동네 사람들한테 급하게 돈을 빌리러 가사람들이 농협에 다니는 너희 아버지를 믿고 돈을 곧잘 빌려 주어서 오빠랑 언니들 때를 놓치지 않고 학교에 보내고 했거든."


그때 엄마의 말이 어린 나에게 쉽게 이해가 되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엄마는 어둑한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밥을 먹고 나면 잠이 부족했는지 고된 몸을 벽에 기대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어린 나에게 자주 보여주었습니다.


엄마는 그 이유를 '나는 초저녁 잠이 많아서...'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을 해 보면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마음 편하게 몸을 쉬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은행을 이용하여 목돈을 모을 수 없었던 50여 년 전에는 동네 사람 끼리 다양한 종류의 계를 통해서 돈을 장만하기도 하고 서로의 친목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면 엄마는 어둑해진 골목지나서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곗방을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기고는 했습니다.


저도 엄마를 따라 몇 번쯤 곗방을 갔습니다. 엄마가 가입한 곗방은 한 군데가 아니고 여러 군데였는데, 엄마는 곗방에 가서도 가끔 피곤한 몸을 벽에 기대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졸기도 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곗방의 풍경은 문간방 혹은 안방에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들이 거의 모인 것 같으면 각자 가지고 온 곗돈을 한데 모아서 그 달치 곗돈을 탈 차례가 돌아온 사람에게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엄마는 급하게  필요할 때면 곗돈을 받은 사람에게 얼마의 이자와 언제까지 원금을 갚겠다고 돈을 빌려달라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거절을 하지 않고 엄마에게 돈을 빌려 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엄마는 또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안 살림에는 무관심하고 처, 자식한테는 함부로 대했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농협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우리 집을 무시하지 못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또 너희들 결혼을 시킬 때도 아버지가 없어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것 얼마나 다행인지 아느냐?"


그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기에 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아버지와 관련하여 들려준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소 엄마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던 때(2013년 2월)까지 해가 바뀌기 전 동짓달이면 잘 알고 지내는 점쟁이나 스님(1990년 이후)을 찾아가서 모든 가족들의 새해 운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운이 좋지 않다고 하는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은 정성을 들여 기도를 했고, 1990년 이후 스님을 알기 이전에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굿을 하기도 했고, 자식들에게 부적을 챙겨 주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던 그 시절에 농협에 다니던 아버지가 느닷없이 빨치산에게 끌려갔던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어느 점집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생사를 물었고, 그 점쟁이가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해서 점쟁이가 하라는 대로 공을 들였는데 며칠 후 아버지가 불쑥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아버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빨치산에 끌려서 산으로 산으로만 가던 중에 어느 날 밤에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꿈속에서 갓을 쓴 어떤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빨리 산을 내려가라고 아버지에게 호통을 쳤다고 했답니다.


아버지는 꿈에서 깨 남들이 깰세라 소리 없이 일어나서 조심조심 어둠 속을 걸었고, 며칠 동안 산속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모습이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빨치산에 끌려갔다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버지의 신원기록에 남아 있어서 1970년대에 셋째 오빠와 넷째 언니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여 김포공항의 출입국관리직에 발령을 받았다가 취소된 일도 있었니다.


그 후로 또 한 번, 유난히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엄마는 또 어느 점집을 찾아가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점쟁이는 아버지의 운수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나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점쟁이의 말대로 아버지를 위해서 정성 들여 굿도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후 어느 , 늦은 저녁 시간에 아버지가 온몸이 피투성이의 다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길 옆에 있는 개울에 거꾸로 고꾸라져서 정신을 잃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아버지의 허리춤에 자전거 눈깔(헤드라이트)만 달랑달랑 달려있었더라는 엄마의 말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생각이 납니다.


그 후로 엄마는 아버지의 태도나 행동으로 인해서 화가 많이 나거나 서운하면, 죽을 뻔한 목숨을 엄마 덕분에 그렇게 두 번이나 살게 되었는데 그 공도 모른다고 한숨을 쉬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가 아무리 밉고, 만족스럽지 못한 남편이라 하더라도 우리 열두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는 곁에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2010년 6월, 아버지께서 8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후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하게 떠나된다고, 내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천도재도 지내 줄 테니 마음 히 잘 가라는 말을 해서 그런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 자식들 -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절대 울지 않겠다고 오랜 세월 다짐하고 다짐했던 딸들도 애써 참았던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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