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이 50살이 되기 이전에는 누구의 딸, 누구의 동생,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며느리로 살아왔던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챙기기보다 나보다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고 배려했습니다.
그런데 50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 삶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지금도 여전히 나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동생이지만,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나'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로해 주지 않고 챙겨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나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나를 칭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끔 내가 나 자신에게 선물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 있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단지 생각만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의 주인공으로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내 자식들도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부모도, 자식도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야 했습니다. 저 또한 너무 늦지 않은 나이 50에 깨닫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가만 저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저에게 너무 늦지 않은 깨우침을 준 것은 오래전 저에게 끊임없이 들려준 엄마의 이 한마디였습니다.
"잘하는 것도 네 것이고, 못하는 것도 다 네 것이다. 그러니 이왕이면 잘하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저는 국민학교 5학년부터 엄마가 며칠씩 집을 비우면 직접 아침밥을 지어 아버지의 아침상을 차려 드리고 도시락도 직접 싸서 학교에 다니고는 했습니다. 그 시절 셋째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오빠들과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언니와 다섯째 언니는 전주에서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엄마가 집에 없을 때면 중학교를 다닐 때 까지는 새벽에 일어나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아침밥을 지었고, 2층 집으로 이사를 간 후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연탄불을 갈면서 아침밥을 지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언니, 오빠들과 자취를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니, 오빠들도 결혼을 하면서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고, 안양에서 부모님과 막내 오빠, 그리고 저와 동생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엄마는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있는 외갓집의 논과 밭에 농사를 지으면서 수시로 집을 비웠습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 그때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엄마가 집에 없는 동안의 집안 살림은 저의 몫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탓에 엄마가 저에게 외갓집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는 엄마에게 "엄마! 외갓집에 또 간다고? 이번에는 며칠이나 있다 오는데?"하고 찌푸린 얼굴로 짜증을 내는 못된 딸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저에게
"잘하는 것도 네 것이고, 못하는 것도 다 네 것이다. 지금 이렇게 잘하는 것이 네가 결혼을 해서도 잘할 것이고, 시댁에서도 너를 잘한다 할 것 아니냐?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훨씬 안 좋냐?"하고 저를 달랬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엄마가 저에게 그냥 하는 말이려니...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때의 엄마의 이야기는 저의 마음을 시시때때로 울리는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을 합니다.
언제나 내 삶의 주인공은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기.
남편 앞에서나 자식들 앞에서나, 그 누구 앞에서도 언제나 당당하게 살기.
마냥 열심히만 사는 것이 아니고, 잘 살기.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아무런 미련이나 후회가 없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