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마음속 깊은 아련한 곳에 언제나 가슴 저린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 말은 바로 '친정엄마'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그날이 언제인지 몰라도, 그날까지 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비춰주실 친정엄마...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계시는 엄마.
오늘 저는, 저의 친정엄마에 대해서 쓰고자 합니다. 제 친정엄마는 지금 살아 계신다면 올해 연세가 100세입니다.
100년 전, 반듯한 양반가에 무남독녀로 태어나신 엄마는, 집안에 선생님을 모시고 한글을 깨쳤습니다.
학력은 '무학'. 평생 배우지 못한 친정엄마의 한입니다. 그때 당시 학교에 갈 수 없던 이유는 양반가의 딸들은 바깥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얻기 위해, 작은댁을 여럿 집안에 들였지만, 결국 아들이든, 딸이든 우리 엄마 하나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에도 이른 새벽에 목욕재계하시고, 백일기도를 드리기 여러 번... 유명한 절에도,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바위 앞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드렸지만 더 이상의 자녀를 둘 수 없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10살이 되던 해까지, 남동생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여자 한복을 제대로 입어 보지 못하고 남장을 하셔야 했답니다. 그래서 비단장사를 하시는 작은 아버지께서 해 주신 고운 한복을 외할아버지 몰래 꺼내 입고는 차마 마당으로 나오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이고는 했답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애지중지 키우신 엄마를 18살 어린 나이에 엄마보다 한 살 어린 아버지와 혼인시키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때 아버지는 중학생이었는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좀 더 신중하게 사윗감을 고르시지 어쩌자고 우리 아버지에게 엄마를 시집을 보내셨는지... 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았습니다.
하기는 그 당시 아버지도 그 근동에서는 알아주는 양반가이면서 부잣집이었고, 아버지는 키도 크고 훤칠한 미남형의 외모에다 머리도 좋아 아무나 쉽게 다닐 수 없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금지옥엽 딸을 위해 따져보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위을 얻으셨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름대로 다른 속셈이 있으셨던 같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면, 훗날 그 친정 재산이 모두 당신 아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훗날 친할머니께서 엄마를 앞에 앉혀 놓고 그런 말씀을 하셔서 우리 엄마 82년 전 그 당시에 시어머니에게 대들었다고 합니다. "제가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 친정 재산을 바라보고 저를 며느리로 들였습니까? 제가 팔이 없습니까? 다리가 하나 없습니까?" 하고... 최 씨 고집의 대단하신 우리 할머니 아무 대답도 못하셨다나요?
그런 속에서 생기는 대로 낳다 보니 5남 7녀, 열두 남매. 아마 외할머니의 셀 수 없는 백일기도의 효력이 우리 엄마에게 모두 나타났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에게서 못 배웠다는 말, 무식하다는 말에 한이라도 맺히셨는지 엄마는 열두 자식 먹이고 입히는 것에는 소홀했어도 어떻게 하든 남부럽지 않게 가르치는 것에는 모든 정성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올해로 80살인 큰 딸을 행여 열두 자식 다 돌보지 못하고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엄마 대신 남은 동생들 잘 돌보라고 약대에 보내서 우리 형제들이 어려울 때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도록 하셨지요. 물론 우리 큰언니도 대학교에 다닐 때, 우리 친할머니, 고모들, 심지어 우리 아버지마저도 딸자식 대학 공부시킨다고 엄마는 무지하게 욕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우리 오빠들은 엄마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하듯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부터 고향에서 100여 리 떨어진 전주로 기차 통학을 했습니다. 기차 통학을 하는 자식들을 위해 14년이 넘도록 새벽밥을 지으셔야 했고요.
저는 지금도 가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김밥이라도 쌀라치면, 자식들을 위해 14년을 하루같이 새벽에 일어나 새벽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고 곤히 잠자는 아들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셨던 친정엄마를 생각하게 됩니다.
남들보다 몇 배 많은 자식들을 슬하에 두셨음에도 단 하나의 자식을 둔 아버지만큼도 열두 자식에게 아무런 관심도 베풀지 않았던 우리 아버지. 엄마의 고생은 아버지의 무관심과 방해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아들들은 초등학교만 졸업시키고 머슴살이 보내고, 딸들은 식모살이 보내라는 아버지의 말씀, 어쩌면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주 어리던 시절, 친정엄마는 열두 자식 몸 건강하고 무사하게 잘 자라게 해 달라고, 날이면 날마다 부뚜막에 정화수 떠 놓고 두 손 모으고 기도하셨지요.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를 다니셨는데, 추운 겨울 엄마가 치맛자락에 묻혀 들어오는 싱그럽고 쌉싸름한 새벽 냄새에 나는 눈을 뜨고는 했습니다.
잠이 들기 전, 엄마가 새벽기도 가시는 모습을 보고야 말리라던 나의 다짐은 어김없이 흩어지고, 언제나 새벽기도를 마치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엄마의 기척으로 잠에서 깨고는 했습니다.
연세가 80살이 넘어가면서 엄마는 예전처럼 새벽기도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기도는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면 다른 날보다 더욱 길어진다는 엄마의 기도시간. 열두 자식 각자의 짝을 찾아, 그 자식들의 손주와 외손주들이 모두 30명,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까지도 엄마의 기도 대상에 추가되었습니다. 빗길에, 혹은 눈길에 자동차 운전하는 자식들 무사하게 해 달라는 기도.
언제인가 저는 엄마의 그 기도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2001년 1월, 설날을 보내면서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심한 몸살과 다른 합병증으로 앓아야 했습니다. 그때 딸이 걱정되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단숨에 달려오신 엄마. 이른 새벽녘, 베란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뒤이어 들려오는 엄마의 기도소리. 그때 나의 가슴 한 귀퉁이가 찡하고 메아리로 울려왔습니다.
나는 지금도 친정엄마를 생각합니다. 엄마로서가 아닌, 여자로서의 엄마를... 나로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높고 높은 산입니다.
엄마가 처음 흘린 눈물이 지금도 나의 기억에는 생생합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때인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 고향에서는 복숭아꽃, 매화꽃이 피는 따뜻한 봄날이면, 동네마다 화전놀이를 갔습니다. 마을의 남녀노소 없이 물 좋고 경치 좋은 장소로 술과 음식, 떡을 마련하여 놀러 가서 북 치고, 장구와 징도 치고, 꽹과리도 치면서 신나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놀던 화전놀이.
그날 엄마는 한잔 술에 적당히 취해 우리 집 안방에서 한쪽 팔에는 열두 째인 내 동생을, 그리고 다른 팔에는 열한 째인 나를 팔베개를 해서 꼭 안고 누웠습니다. 그때 엄마는 한숨을 토하듯 그러셨습니다.
"너희 둘만 있다면 이렇게 양쪽에 꼭 끼고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구나... 새처럼 훨훨..."
그러면서 양쪽 볼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쉴 새 없이 하염없이...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때 흘리던 엄마의 눈물을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귀한 자식으로 태어나고 자라셨으면서도, 그 많은 자식들 행여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다칠까 노심초사하면서 기도 속에서 키워 주신 엄마의 정성.
가슴속의 한을 토해 내듯, 차라리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다는 그 말과 그때 흘린 눈물의 의미를 나이 59살 주부인 나는 지금도 알 듯하면서도 다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