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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Apr 19. 2021

아버지, 당신께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2010년 6월 14일, 아버지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편지

아버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 당신을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고 말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보다 많은 열두 자식을 당신 슬하에 두시고는 진정으로 그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 당신을 마음으로 원망하고 미워했었습니다.

열두 자식 교육과 뒷받침을 엄마에게 모른 체 맡겨 두고, 당신은 오로지 당신 혼자만의 즐거움과 행복만을 추구하며 산다고... 그래서 당신을 애써 외면하고 미워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혼 후 여전히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 손톱을 세우는 저에게 당신 사위는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고, 아버지를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몰라도 그 이후로 당신이 살아온 삶을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어도 당신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당신을 대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지난달 5월,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뵈었을 때 아버지는 여러 번이나 저에게 많이 예뻐졌다고 하셨지요?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가 저에게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 40 후반인 제가, 외모 가꾸기에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는 제가 무슨 예뻐질 일이 있었을까요? 당신도 모르는 그 무슨 까닭이 있었을까요?


오늘 아침, 셋째 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건강이 무척 안 좋아지셔서 요양원에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그 전화를 받은 지 20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셋째 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께서 아침 7시 13분에 운명하셨다고.

언니의  첫 번째 전화를 받기 이전에 당신이 이미 이생에서의 삶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칩니다. 지난달 요양원에 다녀와서 아침 기도 때마다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부디 아버지께서 편안하게 이생에서의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지요.

당신 사위에게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하는 순간, 아버지의 제사와 저의 생일이 같은 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였는지요? 요양원에 찾아 간 저에게 당신 사위 앞에서, 미국에서 온 넷째 언니 앞에서 자꾸만 저에게 많이 예뻐졌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89년 살아오신 당신 삶. 그래도 당신 하시고 싶은 대로 살아온 삶이 아니던가요?

자식들 눈치 안 보고 마누라 눈치 안 보고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삶이었는데, 이생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없이 먼 길 떠나셨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시고 부디 편안한 안식에 드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띄우며 촛불 하나 밝혀 둡니다.

2010. 6. 14.  아침 8시 55분 열한째 명라 드림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로부터 단 한 번도 육성회비를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수업료를 제때에 낸 적이 없어서 칠판에 이름이 적힌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아버지는 저의 수업료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을 해서부터는 언니, 오빠들이 저의 수업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도저히 엄마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셋째 언니에게 연락을 하면, 언니는 우편환으로 바꾼 수업료를 편지봉투에 넣어 제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서무실로 보냈습니다. 그러면 서무실에서 방송으로 '몇 학년 몇 반 한명라 학생은 서무실로 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언니, 오빠들이 모아 보내 준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하면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언니가 저의 수업료를 집으로 보내지 않고 학교 서무실로 보내는 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6학년 가을에 군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버스를 대절할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고향 오수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익산)에서 다시 군산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고, 군산에서 배를 타고 장항제련소를 가는 수학여행 일정이었는데 도저히 엄마의 힘으로는 수학여행비를 마련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셋째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수학여행비를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셋째 언니는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루하루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데 셋째 언니로부터 수학여행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기다림에 지쳐서 '왜 셋째 언니는 수학여행비를 보내 준다고 해놓고 보내주지 않지?'하고 이야기를 하는 내게 넷째 언니는 수학여행비는 이미 오래전에 도착을 했는데 아버지가 받아서 써 버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셋째 언니가 수학여행비와 함께 보낸 것 같은 편지가 편지 보관함에 봉투가 찢긴 채로 발견되었는데 돈은 없더라고 했습니다.


서둘러 편지 보관함에서 셋째 언니가 보낸 편지를 찾았습니다. 언니는 편지에 수학여행비보다 여유 있게 돈을 보낸다고.. 그 돈으로 수학여행비를 납부하고 남은 돈은 모두 저에게 용돈으로 주라고 했습니다. 모처럼 수학여행을 갔는데 주머니에 용돈이 없으면 여행도 즐겁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셋째 언니가 보내 준 저의 수학여행비를 받아놓고 아버지는 수학여행비가 왔다는 사실조차도 알려 주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저에게 수업료나 엄마에게 전달해야 하는 돈이 있으면 셋째 언니는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 서무실로 돈을 보내주고는 했습니다.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뱅킹으로 쉽게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는 1970년대에 있었던 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이것만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혼자만의 3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돈을 벌게 되면 절대로 아버지에게 용돈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약속은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절대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약속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아버지를 위해서 절대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약속을 저 스스로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였고, 그 다짐을 더욱 변함없이 단단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저의 언니들과 동생에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절대로 아버지에게 용돈을 주지 않겠다는 첫 번째 약속은 한동안 모질게 지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할 때 아버지는 저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돈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한테 드릴 돈은 없어요!"하고 현관문을 나설 때, 아버지는 저에게 "저런 싸가지 없는 년!"하고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결혼을 하고, 남편은 아버지를 미워하는 나에게 "아버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신을 위해서라도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라"라고 했습니다. 여러 차례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했을 때, 당신의 삶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아버지가 안되어 보이기도 해서 친정집을 찾아갈 때마다 봉투에 담은 용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그렇게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할 때 절대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하지 않겠다는 두 번째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신랑에게 "우리 결혼식 때 신랑, 신부 동시에 입장을 하자"라는 제안을 했지만, 제가 아버지를 탐탁지 않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랑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라고 단번에 거절을 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절대로 아버지를 위해서 울지 않겠다는 세 번째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입관식을 지켜볼 때, 요양원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 떠 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2010년 5월, 초파일을 맞아 전북 관촌에 있는 요양원으로 저의 남편, 미국에서 귀국해 있는 넷째 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몸을 일으킬 수 없는 건강상태여서 침대에 누워 계셨습니다. 이발도 산뜻하게 되어 있고, 목욕도 한지 얼마 안 되었는지 매우 깔끔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많이 예뻐졌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셨고, '혼자 계시는 시아버지께도 잘하거라'고도했습니다.


그때 문득 아버지의 이마 한가운데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내려와 있는 것과 아버지가 가슴에 모아 쥐고 있는 두 손 끝이 유난히 둥글둥글 부드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려주고, 부드럽고 둥글둥글해 보이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 너무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마 위의 머리카락도 쓸어 올려드리지 못했고, 부드러워 보이는 아버지의 손도 잡아 주지 못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저의 옆에 서 있던 남편이 아버지의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고, 가슴에 모아 쥔 아버지의 두 손을 꾹꾹 잡아주었습니다.


" 이제 그만 가 보거라~"하는 아버지의 말을 뒤로하고 요양원 현관문을 나와서 쉽게 차에 오르지 못하고 떨어지는 빗줄기만 한동안 바라보다가 요양원을 떠나왔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입관식 진행을 가족들과 지켜보면서, 요양원에서의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 용기를 내어서 아버지의 이마 위의 머리카락도 쓸어 올려주고, 두 손도 잡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 때문에 저의 세 번째 약속도 그렇게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알았습니다. 저의 '3가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사실을요. 아마도 독하고 모질게도 아버지에 대한 3가지 약속을 끝끝내 지켰더라면 지금도, 내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후회의 시간을 보낼거라는 것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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