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6개월 정도 전라북도 관촌에 있는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에 잠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고, 다시 건강이 나빠져서 두 번째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그 병원에서 아버지의 89년의 삶에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4남 3녀 7남매 중 여섯째입니다. 위로 두 명의 형님과 세명의 누나, 그리고 남동생이 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농협에 근무하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서 빗어 넘긴 머리. 그래서 아버지에게서는 강한 포마드 냄새가 났습니다. 양복차림에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 1970년대 당시 고향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열두 자식들 교육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우리 집 살림에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남에게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있어 보이는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멋진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남들보다 잘 살고 있다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장에서 제일 크고 좋은 과일과 고기를 바리바리 사서 우리 집이 아닌 큰집에 갖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설날이면 빳빳한 신권을 준비를 해서 큰집, 작은 집 조카들의 새배를 받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내어 세뱃돈으로 주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이나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가 농협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아주 부잣집이고, 또 열두 자식 모두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남들이 아버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큰오빠의 대학 입학을 위한 등록금을 끝내 외면했던 아버지. 그날 이후로 엄마는 자식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빚을 내서라도 어떻게든 대학 등록금을 준비해서 자식들 대학 교육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엄마의 바람대로 약사가 되어 약국을 운영했던 큰 언니는 결혼을 해서 처음에는 서울 흑석동, 그다음에는 화곡동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큰언니는 오빠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었을 때 목돈을 장만하기 위해서 동생들과 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동생들이 월급을 타면 일정 금액의 돈을 큰언니에게 곗돈으로 내게 하였고, 그 돈이 목돈이 되면 언니는 그 돈을 동생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엄마, 아버지의 빚을 갚도록 했습니다.
그때 곗돈을 가지고 엄마와 함께 이곳저곳으로 빚을 갚으러 다니던 둘째 오빠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엄마가 빌린 돈을 갚으러 가면, 엄마는 '이 돈은 누구의 등록금을 납부하느라 진 빚이다' 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이자까지 꼼꼼하게 계산해서 빚을 갚다 보면 그 돈이 없었다면 우리 형제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것 아니냐는 생각에 빚을 갚으면서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빚을 갚다 보면 엄마의 빚을 갚을 때와는 반대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쓴 돈인지 알 수 없는, 우리 가족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오로지 아버지만을 위한 돈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농협에 근무할 때, 우리 집 대청에 놓인 쌀뒤주가 텅텅 비어 있어도 오직 자신만의 삶을 즐기던 아버지. 자신의 외적인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심이 우리 가족들에 대한 관심보다 더 컸던 아버지.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노름도 하고, 다른 여자와 바람도 피우셨다는 아버지.
그렇게 '남에게는 100점, 가족에게는 0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우리 가족 누구도 아버지의 죽음을 애써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언니는 지금도 아버지 산소 앞에 서면 아버지께서 큰 고생하지 않고 엄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것이 우리 열두 남매에게 가장 고마운 일이라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날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첫날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우리 자매들이 한자리에 앉아서 아버지로 인해서 경험했던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전기요금 많이 나온다고 밤에 공부하지 말라고 하는 아버지 몰래 천으로 방문을 가리고 공부하던 넷째 언니에게 '아버지 말을 우습게 안다'라고 폭력을 행사하던 일.
대문 앞에서 서서 중학교 수업료를 달라고 하는 다섯째 언니에게 '누가 너더러 학교에 다니라고 했냐'며 기다란 장대를 휘두르면서 집 밖으로 쫓아내던 일.
중학교에 다니던 막내 오빠의 책가방을 '학교에 그만 다니라'라고 돼지우리와 집 옆의 논에 내던지던 일, 돼지똥이 묻은 책을 흐르는시냇물에 씻어 말리면 그 책의 두께는 두배는 되었고, 책을 펼치면 제대로 씻기지 않은 돼지똥 냄새가 났다는 일.
아버지와 관련된, 그리 즐겁지 않은 그런 일련의 추억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은 서로 소리내어 웃기도 했습니다.
그때 곁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둘째 작은 집 사촌 오빠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의 희망은 작은 아버지처럼 멋지게 사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훤칠한 키와 양복과 넥타이로 잘 차려입은 모습. 빗겨 넘긴 머리. 설날이면 빳빳한 새돈으로 건네주던 세뱃돈. 그리고 친척들 모두가 아버지를 반갑게 반겨 주는 모습에 자신은 우리 아버지처럼 멋진 삶을 사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아주 부잣집이고, 우리 형제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도 모두 작은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후, 저의 블로그에서 나는 사촌오빠가 남겨 놓은 댓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멋지게만 보였던 작은 아버지가 네 가족들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항상 그런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어제 장례식장에서 많은 대화와 새벽에 귀경하면서 우리 누나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조금은 작은 집 가족들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도 분명 그럴만한 어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제 지난 것은 모두 잊고 너와 가족들을 낳아주신 아버지시니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가신 이의 명복을 빌어 드림이 좋을 것 같다.'
2010. 6. 16. 규욱 오빠
규욱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되었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기 오래전부터요.
그렇게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의 가족들 보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사셨던 아버지가 안되어 보이고, 안타깝기도 했지요.
조금만 우리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셨다면 우리 열두 남매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사셨을 텐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살아야 했던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우리 인간의 삶에는 정해진 답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열두 남매와 엄마는 어찌 되었건 아버지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서 나름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사셨겠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열두 남매가 불행한 삶을 산 것은 아니잖아요?
나름대로 힘든 시절을 이겨내면서 그 안에서 이루어내는 성취감에 만족해하고, 또 그 안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