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빈이 아빠의 작은 승리..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던 효빈 아빠

by 한명라

내가 효빈이 아빠를 처음 만난 곳은 1980대 중반, 종로 3가 뒤편의 관공서 건물 두 개가 나란히 공존하는 관공서 앞 사무용품 가게에서였다.


그 가게는 나의 셋째 언니의 가게로 아직 어린 두 아들 때문에 언니는 직접 운영할 수는 없었고, 야간대학에 다니는 나에게 셋째 언니로부터 거의 반강제적으로 떠 맡겨진 가게였다.


나는 그곳에서 관공서에서 필요한 사무용품, 관공서를 드나드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세무서식을 판매하거나 서류 등을 복사해 주는 일들을 했다.


효빈이 아빠는 그 사무실 한편에 책상 하나를 놓고, 관공서를 오고 가는 사람들의 급한 나무도장이나 고무도장, 그리고 명함 등을 만들어 주고는 생계를 이어 가는 일명 '도장 아저씨'였다.


키는 160 정도로 자그마했고, 몸무게도 별로 나가지 않는 마른 체구에다, 유난히 도수가 높아 보이는 두껍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효빈 아빠는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가지고 있었고,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꼭 성우처럼 낭랑하고 굵은 음성을 지녔었다.

그러나 효빈 아빠는 다른 사람과는 말 한마디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누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상에 책을 펴 놓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 있었다. 그러니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효빈 아빠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그때 당시 효빈 아빠의 나이가 30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나는, 가끔 더운 여름 날씨에도 젖먹이인 효빈이를 힘겹게 등에 업고 찾아오는 효빈 엄마를 보고 대학에 가려고 뒤늦은 공부를 하는 효빈 아빠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효빈 아빠 친구의 여동생이라는 효빈 엄마는 외모도 체구도 효빈 아빠와 닮은 친남매처럼 보였다.


부천인가, 부평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는 효빈 아빠는 언제나 점심은 네모난 양은 도시락으로 싸 왔는데, 반찬은 김치 아니면 멸치 볶음이었고,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한 날을 우유 한통과 빵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고는 했는데, 그 마저도 마음 놓고 사 먹지도 못하는 빈곤한 형편에 대학 진학을 꿈꾸는 효빈 아빠가 헛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입시학원에도 새벽반과 오후반, 하루에 2번 단과반에 다니던 효빈이 아빠는 가끔 낮에도 자리를 비워야 하는 까닭에 급한 도장 손님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주변의 누구 하나 효빈이 아빠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안되어 보이고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고는 했다. 그러면 효빈 아빠는 내게만은 자신의 속내를 들춰 보여주곤 했다.


야간대학의 중어중문과에 진학해서 대만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그래서 강단에 서고 싶다고. 가게에서 도장을 파는 일 이외도 밤에는 번역일도 하면서 자신의 학원비와 생활비를 번다는 효빈 아빠는 그 작은 체구로 사는 게 무척 힘들고 고단해 보였는데도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일은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효빈 아빠와의 인연은 3개월 정도 지나서 끝나게 되었다. 도장을 파서는 영 살기가 힘들었는지 다른 일거리를 찾아 도장 파는 책상은 다른 사람에 넘겨주고 떠나 버렸다.

너무도 오랜 일들이라 헤어질 때의 표정이나 말들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후로 가끔씩 효빈이네가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서울을 떠나와 경남 창원에 자리 잡은 지도 몇 년이 지난 1990년 중반.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효빈이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항상 대학교 졸업 때만 되면 신문 한자리를 차지하던, 그 해 어느 대학교의 수석 졸업생에 대한 기사. 그 기사의 주인공으로 효빈이 아빠가 신문에 실린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야간대학 중어중문과 출신으로 그해 수석 졸업생이라고. 효빈이는 그동안 남동생 하나를 더 두었고, 번역 일과 장학금으로 생계와 학업을 이어 갈 수 있었고, 같은 과의 나이 어린 동기들이 여러모로 나이 많은 동기의 어려운 생활을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아 주었다고.


그리고 여전히 대만으로 유학해서 강단에 서고 싶다는 효빈이 아빠의 꿈이 그 기사에 실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예전에 내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활짝 웃는 모습으로 효빈이와 효빈이 동생, 그리고 효빈 엄마, 아빠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웃음을 짓은 얼굴들이 신문지 전체를 덮고도 남을 듯 큰 사진으로 느껴졌다.


그 밝은 웃음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그 가족들만이 알고 있는 어렵고 힘들었을 지난날들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과의 나이 어린 동기들의 효빈이네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도 잔잔한 감동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기사를 읽은 후, 며칠 동안 효빈 아빠에 대한 감동으로 붕붕 떠 있었던 기억이 생각이 난다.


나는 지금 그 가족들을 가끔 생각한다.


효빈이 아빠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은 다녀왔을까?

지금 효빈이 아빠는 대학교 강단에 서고 있을까?


다시금 활짝 웃는 모습의 인간승리라는 기사로 신문, 혹은 어느 언론에서 그 가족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효빈이 아빠와 그 가족들은 최선을 다해서 자기들 몫을 충분히 이 사회에 보태어 가며 살고 있으리라 나는 자신 있게 믿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