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오빠와 호떡장사 친구
열두 남매 중 넷째, 둘째 오빠 이야기..
내가 어리던, 아마 국민학교 1학년 때 기억 속에 고향의 시장통에서 호떡 장사를 하는 둘째 오빠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둘째 오빠는 그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자원하여 월남에서 군대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민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통을 지나오다 보면 나는 가끔 오빠의 호떡 장사 친구와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러면 호떡장사 오빠의 친구는 반갑게 내 손을 이끌고 호떡 몇 개를 종이봉투에 싸 주고는 했습니다.
사람들의 오고 가는 발길이 잦은 식당 벽 한편에 리어카를 세워 놓고, 군데군데 찢어진 포장비닐로 천막을 쳐서 꼭 동화 속 우렁이 각시같이 마음이 착해 보이는 예쁜 색시와 오빠 친구는 호떡을 구워 팔았습니다.
나중에 엄마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 당시 호떡장사 친구는 정신이상으로 집을 나가버려 생사도 모르는 엄마와 반신불수로 대소변을 받아 내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줄줄이 딸린 여러 동생들로 하여금 엄마처럼 아버지와 동생들을 보살펴 줄 여자가 있어야 했기에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림부터 차렸다고 했습니다.
나의 언니들하고도 여러 번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 호떡 장사 친구는 우리 둘째 오빠와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어울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둘째 오빠는 비록 아버지가 입다 버린 무릎이 나온 낡은 코르덴바지와 군용 잠바, 그리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을 망정 전라북도에서 알아주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호떡장사 친구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못했는데, 어떻게 친구의 인연으로 두 사람이 엮어졌는지는 우리도 잘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엄마는 생각이 날 때마다 그 호떡장사 친구의 안부를 궁금해하였습니다. 정신이상으로 가출한 어머니의 생사는 확인되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시장통에서 포장을 걷고 소식 없이 사라졌는데 어디 가서 잘 살고 있는지.. 그 많은 동생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거동이 불편하던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계시는지.. 등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1년 8월, 내가 딸아이를 낳고 나서 안양에 있는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러 잠시 가 있을 때였습니다. 아주 반가운 손님이 엄마를 찾아왔습니다.
오랫동안 엄마가 궁금해했던 그 호떡장사 친구가 양 손에 과일과 고기를 사 가지고 "어머니.."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엄마는 마치 오랜만에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릅니다. 나도 엄마와 함께 호떡장사 친구와 마주 앉아 그동안 궁금해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형편이 많이 어려운 자기를 둘째 오빠가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는 이야기..
고향에서 호떡장사를 해서는 동생들과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가 많이 어려워도 차마 우리 오빠에게는 연락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나중에 오빠에게 연락을 했는데, 오빠가 자리를 잡도록 많이 도와줬다는 이야기..
서울에서 꽈배기와 도넛을 구워서 이곳저곳 납품하는 일을 했는데 제법 잘 되어서 형편이 많이 나아졌는데, 나중에 불이 나서 다시 빈손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때마다 오빠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는 이야기..
오래전 집을 나간 어머니는 끝내 소식을 알 수 없어서 생일날 제사를 지낸다는 이야기...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동생들도 다들 착하게 잘 자라서 자기 앞가림은 하고 산다는 이야기..
그리고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이제는 서울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다는 근황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항상 오빠를 통해서 자기 가족을 챙겨주셨던 우리 엄마가 언제나 뵙고 싶었고,
앞으로도 친어머니처럼 자주 찾아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후 들은 이야기로 호떡 장수 친구는 우리 친정집에 몇 번 더 다녀갔다고 했습니다.
2010년 6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2013년 3월 엄마께서 돌아가신 후, 우리 집은 매월 5월이면 시간이 허락되는 형제들과 조카들은 산서면 오산리 친정집에 모여서 두 분의 합동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 2021년에는 5월 8일에 친정집에 모여서 친정부모님의 합동 제사를 지내려고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집을 찾아올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호떡 장사'라고 부르는 둘째 오빠의 친구였습니다. 하얀 봉투에는 현금 20만 원을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부모님의 합동제사를 지내고 난 후, 가족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와 과일을 나누어 먹으면서 호떡장사 친구의 근황을 묻기도 하고,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호떡장사 친구는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위로 3명의 딸과 막내로 늦둥이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온 식구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딸 셋을 낳고 이제는 그만 낳으려고 자신이 정관수술을 했는데, 어느 날 마누라가 임신을 했다고 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마누라를 의심하기도 했답니다. 뒤늦게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도 종종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태어난 아들이 대학교도 졸업을 했고 지금은 결혼을 해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딸 셋도 모두 결혼을 했는데, 다들 좋은 짝을 만났고 사돈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딸을 좋아라 하는 사돈이 몇 년째 자신에게 쌀을 보내주어서 잘 먹고 있다고 자랑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을 하고 있을 때, 서울 흑석동에서 접촉사고를 냈는데 사고를 낸 상대 차량이 청와대 소속이어서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빠와 상의를 했는데, 일이 잘 해결되어서 물질적인 부담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둘째 오빠와 계속 이어진 인연으로 몇 년 전 우리 친정집에서 멀지 않은 지사면으로 이사를 와서 지금은 소도 몇 마리 키우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자신의 아내가 지금은 초등학교 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거쳐서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해져서 입이 많이 야물어졌다고도 했습니다.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상의를 하면, 오빠는 거절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호떡장사 친구가 돌아간 후, 둘째 오빠는 그 친구가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오빠에게는 그렇게 크게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나에게 도와 달라고 했겠느냐고.. 그래서 도와주었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5월, 둘째 오빠와 호떡 장사 친구를 보면서 어쩌면 두 사람은 60년도 훨씬 넘는 시간에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인연을 이어가는지...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좋다'는 호떡장사 친구의 이야기가 저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오랫동안 메아리가 되어 마음을 울립니다.
2013년 5월, 둘째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