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우리 집 근처에 탕수육을 정말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다. 음식점 이름은 〇〇〇짬뽕이다. 탕수육과 짬뽕, 자장면이 주 메뉴다. 그 탕수육은 찹쌀 튀김옷이라 하얗고 소스도 투명하다. 방금 튀겨낸 튀김에 달콤하고 투명한 소스를 얹어 나오는 탕수육에 이미 미각과 후각이 취해 버린다. 탕수육 하나를 집어서 간장소스를 찍어 입에 넣으면 전인격적으로 황홀해진다. 우리 식구는 서울서 학업을 하고 있는 아들이 내려오는 날이면 그곳을 찾는다.
그 집의 탕수육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첫맛의 원시적인 탕수육의 맛을 나의 혀는 기억하고 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2년간 중학교에 진학 못했던 오빠가 입학하는 바람에, 대신해서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1년 후에 보내주겠다던 엄마의 약속이 흐지부지해지면서 독학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독학생을 위한 ‘강의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신문에 나와 있는 광고를 보고 전화로 주문을 했다. 며칠 후 어떤 아저씨가 내가 일하는 공장으로 강의록을 가져왔다. 그 아저씨는 동정심 어린 눈빛을 보내더니 진심으로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 갔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과목은 그렇다 치고 지금 생각해봐도 영어책의 구성이 재미있었다. 영어 발음이 한글로 영어 밑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알파벳 ABC도 모르고 있었으니 발음기호가 뭔지 알 턱이 없었다. 혼자서 배운 실력이라 지금도 영어 실력이 그저 그렇다. 영어뿐 아니라 상식도 많이 달린다.
야간작업이나 철야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언니는 타이밍을 먹고 일했고, 어떤 언니는 객혈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절대 시간이 부족한 건 신도 어쩌지 못했다. 궁리 끝에 공부시간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기기로 했다. 자격이 중졸 이상이라는 정밀기계공장에 이력서를 써가지고 갔다. 졸업장은 그냥 요식행위였는지 아니면 일손이 부족한 회사였는지 그냥 붙여 주었다.
그 회사는 9시에 출근하고 퇴근 시간이 오후 6시였다. 야근이나 철야도 없었다. 다른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그로부터 3년여 동안을 하루에 적어도 6시간씩 공부를 했다. 널찍한 회사 식당에 혼자 남아 공부하다가 집으로 가서 또 공부하고, 새벽에 출근 전까지 공부하고, 버스 타고 가면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쉬는 날이면 새벽부터 남산도서관까지 가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검정고시를 봤다. 첫 시험은 과락으로 떨어졌고, 두 번째에 붙었다.
시험 봤던 학교 게시판 합격 공고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의 이름은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진하고 커 보였다. 공중전화로 아버지에게 합격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다소 흥분된 딸의 목소리를 듣고 말을 잇지 못하시더니,
“얼른 들어오너라, 저녁에 탕수육 먹자”라고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딸이 가장 먹고 싶어 하던 탕수육 맛으로 축하의 말을 대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