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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Sep 05. 2020

첫 출근

1975년 어느  봄날

우리 가족이 살던 셋집 앞쪽에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공터가 있었다. 나도 늘 그곳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았다. 노을이 물드는 공터는 언제나 따뜻했다. 뒤편으로 놀이터가 있었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더 이상 놀이터에 가지 않았다. 

공터 앞쪽 논두렁 건너편에 낮은 스레트 지붕의 건물이 있었다. 공터에서 보면 아침저녁으로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갔다가 우르르 나오곤 했다. 뭐하는 곳인지 늘 궁금했다.


어느 날 궁금증이 풀렸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공터에서 놀고 있던 나를 어머니는 그 미지의 건물로 밀어 넣었다. 그곳은 대기업의 수주를 받아 스웨터를 만들어 수출하는 보세공장이었다. 

어떤 아저씨의 뒤를 따라 건물로 들어가니 처음 들어보는 기계소리가 요란했다. 모든 게 생소했다. 이윽고 아무런 절차 없이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언니가 나의 손에 ‘쪽가위’를 쥐어 주고 실밥 뜯는 시범을 보이더니 그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13살짜리 아이가 하기에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한 그 일에 빠져 캄캄해졌는지도 몰랐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철야작업을 했다. 알고 보니 공장에서는 철야작업이 일상적이었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고 싶은데... 어떡하지?”스레트 지붕 아래에는 나를 대변해 줄 그 누구도 없었다. 새벽 3시에 철야작업을 마쳤다. 다들 어디론가 잠자러 사라졌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듬성듬성 쌓여 있는 미완성된 스웨터 더미 속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눈을 뜬 채로...
 
햇살 맑은 아침, 스레트 지붕에서 나왔다. 멀리 논두렁 건너편으로 내가 놀던 그림 같은 공터가 보였다. 공터를 향해 냅다 달렸다. 

밤샘을 하고 나온 나에게 어머니는 소리 나는 둥근 양은(洋銀) 밥상에 밥을 차려 주었다. 밥과 김치가 온통 실과 스웨터로 보였다. 그런데 자꾸자꾸 눈물이 글썽여졌다. 어머니가 눈치 채지 못하게 눈물을 훔쳤다. 정적이 흐르는 밥상머리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번갈아가며 들었다 놓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마치 기계음처럼...

그 후, 붉은 노을에 길게 자라는 나의 그림자를 공터에서 볼 수 없었다. 공터는 딱딱하게 마르는 유화 그림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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