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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Dec 01. 2020

‘어린이’ 아들아!

엄마가 미안해!


요즘 군대 간 아들과 자주 통화를 한다. 군대 간 아들과 자유롭게 전화를 할 수 있다니,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대화의 내용은 다양하다. 처음에는 군대생활 적응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책 읽은 이야기를 했다.

책 읽은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가 왜 그렇게 책을 읽으라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단다.

아빠는 아들에게 흔히 하는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보다는 “책을 좀 읽어라”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잔소리로 느꼈는지, 독서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는지, 아니면 난독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책을 손에 잡지 못했다.     

그런데 군대 가서 아들은 책 읽기를 시작했다. 읽고 싶은 책을 보내달라고까지 했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니?”라는 말부터 시작되는 엄마와의 대화가 길어졌다.     


아들은 한동안 심리학자 아들러(A. Adler)에 심취했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제자이긴 하나 프로이트와는 다른 심리학 이론을 펼쳤다. 프로이트는 무의식(unconscious), 이드(id), 슈퍼 에고(super ego)에 의해서 이미 인간은 결정된 존재라고 하였다. 인간은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즉, 무의식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 갈등 치료에 있어서 무의식을 약화시키고 조절하는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반면에, 아들러는 이성적 낙관론자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의 원초적인 결핍은 오히려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며, 그 결핍이 모든 역경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원초적 결핍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현재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비극도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짧은 소견으로 이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그냥 인터넷에 게재되어 있는 이론을 흩어 보았다. 아들은 한동안 단순히 아들러 이론을 읽기보다는 자신의 문제를 아들러 이론에 적용해보는 과정을 겪었다.     


내가 “겪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아들이 ‘어린이’ 자기와 직면하면서 많이 아파했기 때문이다. ‘어린이’ 아들은 엄마인 ‘나’와 탯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아들은 늘 자존심은 강하고 자존감은 약한 자기를 못 마땅히 여겼다. 나름대로 자존감을 강화시켜보려는 외면적 시도를 했다고 한다. 대학 춤 동아리에서 멋진 춤을 선보이기도 하고, 동아리 회장으로 동료와 후배들의 선망이 되어보기도 하고, 멋진 옷과 폼으로 자기를 돋보여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자존감이 강화되기는커녕 더 작아지는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를 되뇌이다가 자신의 내면에 ‘결핍’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이 직면한 ‘결핍’은 어린 시절에 겪은 엄마의 ‘부재(不在)’였다.

종일반이던 아들은 유치원 오전반 애들이 집으로 갈 때, 친구들 없이 혼자 덩그러니 텅 빈 유치원에 남아 있던 ‘어린이’였다. 종일반에 있고 싶지 않아서 혼자 집으로 갔을 때 엄마는 집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으니 놀 친구를 찾아 이 집 저 집 헤매었던 ‘어린이’였다. 집에 있는 동전을 찾아 문방구에 가서 물건 나오는 기계를 가지고 놀기도 해보고, 학원 안 가는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친구랑 놀다가 학원가는 친구들을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했던 ‘어린이’였다.    


아들은 부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집요하게 요구했던 ‘어린이’였다. 요구할 때 뗑깡을 부리지 않는다. 온갖 애교의 언어로 엄마 아빠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랬던 자기 모습이 너무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왜 나는 갖고 싶은 것을 단번에 얻을 수 없었던가?”

“왜 나는 메이커가 아닌 비 메이커만을 선택해야만 했는가?”

“왜 나는 노트북도 알음알음해서 중고만을 사야 했는가?”

“왜 나는 늘 친구 찾아 헤매는 아이인가?”...    



저명한 심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간의 ‘결핍’은 없을 수 없다고들 한다. 단, 그 결핍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한다. 아들은 아들러가 말한 결핍이 역경을 극복해 낼 수 있는 ‘힘’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픈 자기의 모습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절제와 절약과 독립심을 미덕이라 가르쳤던 엄마의 교육지론에서는 무용담이던 이야기가 아들의 성장드라마에서는 트라우마였고 결핍이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부재했던 엄마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린이’ 아들아! 엄마가 미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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