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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Jun 12. 2020

테스

영화 감상

   

‘테스’라는 영화를 봤다. 테스는 여러 나라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된 바가 있을 정도로 거작이다. 1979년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하고 나타샤 킨스키가 주연했던 영화를 2014년에 재개봉했다. 케이블 TV 영화채널에서 구입했다가 볼 짬을 얻지 못하다가 #Me Too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찾아보았다. 

토머스 하디(Thomas Hardy)가 1891년에 쓴 소설 ‘테스’는 청소년 시절에 읽었다. 청소년 시절 내가 관심 있게 읽었던 책은 주로 여자의 일생을 주제로 한 소설이었다. 테스를 비롯하여 기억나는 게 ‘여자의 일생’, ‘대지’, ‘부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이다. 이 소설들은 공통점이 있다. 불가항력적인 인습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당당히 삶을 개척해 가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하는 사랑마저도 인습에 짓밟히고 마는 것을 읽으며 나는 페미니즘적 감수성을 키웠던 것 같다.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웬만하면 사랑이라는 감정적 명목에도 희생되지 말아야지라고 하면서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살기로 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의 저항적 성격도 대부분 그때 형성된 게 아닌가 싶다. 딸을 키우면서 치마를 입히지 않았고 핑크보다 블루 계통의 옷을 입혀 키웠다. 장난감도 인형보다 자동차를 사줬다. 아들을 키우면서 부엌일을 시켰고 딸의 기를 더 세워준 것도 그런 류의 삶이었던 거다. 


이러한 저항심은 나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첫아들 다음으로 태어난 딸인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살림 밑천’을 낳았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살림밑천’이란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남성의 삶을 거들어 주는 존재라고 해석하면 맞을 것이다. 나는 가난한 집의 테스로 태어났기 때문에 일곱 살이 되면서 막내 동생을 나의 등에 업기 시작했고, 좀 더 크면서는 연탄불과 석유곤로에서 해야 하는 저녁밥의 책임이 주어졌다. 좀 더 크면서는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가 세진다고 최소한의 교육만 시키려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고단한 삶을 여자인 나와 함께 나누어 인습을 대물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테스에게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이성적인 당돌함이 있었다. 알렉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당당한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러나 엔젤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몰입되고부터는 그녀의 이성적 당돌함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테스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청소년 시절을 거치고 대학시절에도 나의 정신적 화두는 단연,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성 확보였다. 그리하여 나의 여성성에 담을 쌓고 살았다. 청바지에 운동화, 짧은 머리, 딱딱하고 똑 부러지는 말투, 다가오는 남자를 무심한 듯 쳐다보는 등등...     

그 후...

다 큰 처녀가 되어 사랑의 호기를 만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랑의 감정에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남성인 남편은 겉으로 드러난 나의 상큼 발랄(?)한 모습과는 달리, 무너지다 만 귀퉁이의 담벼락을 무심코 건드렸을 때,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저항적 행동양식을 보고 무척이나 놀라 했다.


50대 중반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청소년 시절 미처 깨닫지 못한 지점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감정적 사랑이 이성을 무너뜨린 게 아니었다. 그녀의 사랑과 이성의 조화로운 힘은 종반부를 치달으며 완성되었다. 그녀의 내면에 자신의 순결을 무참히 짓밟은 알렉을 죽일 수 있었던 힘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엔젤과의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순결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사랑과 이성의 완전체의 배경으로, 영화는 영국의 스톤헨지 돌 제단 위에서 잠자는 테스를 앵글로 잡았다. 스톤헨지는 앵글로 색슨어로 ‘공중에 매달린 바윗돌’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장례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주장과,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는 테스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제단에 바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말, 테스를 소설로 내어 놓았던 토머스 하디는 영국 사회로부터 여성 옹호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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