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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Jun 17. 2020

네에! 개 두 마리에 고양이 일곱 마리?

세상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잘 지내길...

   

아파트에 사는 동안 일상적으로 피서를 위해 아침 일찍 카페로 가곤 했다.

어느 날 우리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동네의 카페로 갔다.

가지고 간 텀블러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는 책 읽기를 시작했다.

내가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조용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부지런을 떤다.

30분쯤 지나니 나처럼 더위를 피해서 카페로 모여드는 여인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내가 앉은 벽 쪽으로 붙어 있는 자리에 한 무리의 동네 아줌마들이 이야기 마당을 벌렸다.

시원한 인견 원피스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모습에서 멋보다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50대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서로 부르는 호칭은 형님 아우였다.


자연스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마을에 떠돌아다니는 길고양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동네 ‘캣맘’들이었던 거다.

이야기 인즉은, 동네 얼룩 고양이가 며칠 전에 새끼 네 마리를 낳았다는 것이다.

어미가 새끼들한테 젖을 먹이면서 색색거리는데 마음이 아프더란다.

그러면서 그 애기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니 걱정이 된다고...    


우리 집에 누런 얼룩 고양이가 잠시 왔던 적이 있다.

딸내미가 어느 아파트 옆 찻길과 인도 사이에서 뒹굴고 있던 아이가 안쓰러워 데리고 왔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말하기를, 일주일 전부터 계속 그곳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했단다.

아마도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인데 새끼를 배어서 밖으로 내놓은 것 같다고…

동물을 각별히 생각하는 동정심이 많은 딸내미가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안고 왔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고양이의 등장으로 우리 집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우리 집 강아지 또리(보더콜리)는 놀라서 벌벌 떨며 현관 밖으로 나가려 했고,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거대한 개가 집에 있으니 놀랬던 모양이다.

몸을 떨면서 자꾸 구석으로 도망간다.


사실, 또리는 덩치에 안 맞게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고양이 있는 곳은 절대로 가지 않고 돌아서 간다.

개가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우리 집에 왔는데. 오자마자 동네 대장 고양이와 맞닥뜨렸다.

기싸움에서 물러나더니 그때부터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어쨌든 뜻하지 않은 고양이의 등장으로 어찌해야 할지 가족회의를 해야 했다.

딸내미는 어릴 때부터 종종 식구들한테 공동 책무를 주었다.

강아지 입양 때도 그랬고, 햄스터, 고슴도치, 토끼, 물고기 등등...

강아지와 고양이가 같이 지낼 수 없어 고양이를 도로 내놓아야 하니 곤란에 빠졌다.

고민 끝에 강아지 두 마리를 아침저녁으로 산책시키는 앞 동 1층에 사는 부부가 생각났다.

 

그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사연 또한 기가 막히다.

어느 날 우리 강아지와 산책하다가 흰색 개를 산책시키는 그 부인을 처음 만났다.

그런데 아파트 쪽문의 몇 개 안 되는 계단도 그 아이는 벌벌 떨며 내려오지 못했다.

그래서 사연을 듣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승마장 근처를 지나가다가 어떤 아저씨가 울부짖는 개를 트럭에 싣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개를 어디로 데려가느냐고 물으니, 이제 새끼를 많이 낳았으니 보신탕집에 판다고 했다는 것이다.

평생 짬밥만 먹으며 1m 목줄에 묶여 새끼만 낳다가 '인간의 보신'을 위해 실려 가는 강아지의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집으로 데리고 와보니, 배속에 또 새끼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부부는 강아지 이름을 ‘사랑’이라 했다.

사랑만 받으라는 뜻에서 그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사랑이는 계단도 못 내려올 정도로 겁이 많았다.

걸음을 걸은 적도 없고 계단을 오르내린 적도 없으니 얼마나 세상이 무섭고 두려울까?

무엇보다도 사랑이는 사람을 무서워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뒷걸음쳤다.

 

얼마 후,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두 마리 다 검정 개인 것을 보니 부견이 검은 개였던 거다.

한 마리는 동생네가 데리고 갔고 한 마리는 어미와 같이 키우고 있다.

새끼 이름은 ‘푸름’이다.

늘 푸르라고 그리 지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끼 강아지도 어미처럼 겁이 무지 많았다.

두려움 속에 살던 어미 뱃속에서 이미 세상의 무서움을 알았던 모양이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사랑이와 푸름이의 때깔이 좋아 보여 기분이 좋았다.

산책도 잘하고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집 강아지랑 인사도 잘 나누었다.

무엇보다 한 마리씩 데리고 산책하는 부부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여하튼, 고양이 문제를 그 부인과 상의해 보기로 하고 벨을 눌렀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밖으로 나왔다.

현관 앞에서 고양이 사연을 상의했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 고양이가 일곱 마리 있어요.”

라고 하는 것이다.

“네에! 개 두 마리에 고양이 일곱 마리나?”  

게다가 고양이 한 마리를 얼마 전에 중성화를 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

아이고 어찌할꼬! 혹 붙은데 혹을 붙여 줘야 하나?

나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이란 참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상의를 해봤다.

그 부인은

“어떡하지? 어떡하지?”하면서

“며칠만 기다렸다가 데리고 들어 갈게요. 그때까지만 베란다 밖 화단에 놔도 보죠”라고 했다.


고민을 함께 해주는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베란다 밖 화단에도 이미 세 마리가 터를 잡고 있었다.

그곳에 상자로 산실을 만들어 놓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서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먼저 터를 잡은 아이들이 가만 둘리 없었다.

쫓겨난 것이다.

딸과 나는 며칠을 찾아다녔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뒷길 건너 젓갈집 아저씨가 그 아이에게 북엇국을 먹이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갑던지!!

영문을 물어보니, 아이가 자꾸 자기를 거두어 달라는 몸짓을 하며 젓갈집 앞에서 떠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살펴보니, 새끼를 낳을 것 같아 가게 뒤편에 산실을 마련해 주었고

며칠 전에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고 한다.

딸과 함께 뒤편에 가보니, 눈도 채 못 뜬 꼬물이들이 꼬물꼬물 뭉쳐 어미젖을 먹고 있었다.

사랑이 견주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니,

“다행이네요! 다행이네요!”라고 하면서 무척이나 기뻐했다.

젓갈집 아저씨 말에 의하면, 네 마리는 젖 뗀  후 입양이 예정되어 있고, 한 마리는 어미와 같이 젓갈 집에서 기를 거라고 했다.


문득,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이 떠올랐다.

사람은 신의 사랑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람’은 ‘살아 있는 것들’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신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만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잘 지내길...

신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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