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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Jun 28. 2020

개 덕분이다

쵸코와 또리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맑은 날 아침,    

쵸코가 죽었다. 쵸코는 우리 집에서 딸내미가 기르던 골든 햄스터다. 

2년 남짓 건강하게 살다가 숨이 다하여 죽었다.

며칠 전부터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마치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던 듯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고는 숨을 다했다.


집에서 숨이 다한 존재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젊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그저 하찮은 듯 무덤덤했던 것 같다.

하기야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가슴 설렘조차도 없었으니

숨을 달리하는 것들을 대하는 마음도 그랬으리라. 


남편과 나는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그리고는 나의 삶의 어느 부분에서

생명에 대해 하찮게 여겼던 것을 반성하듯 기도를 했다.

산에만 올라가면 이리저리 뛰며 좋아했던 우리 집 강아지 또리(보더콜리)도 

슬픈 눈을 하고 멀찌감치 앉아서 지켜보다가 작별 인사를 하듯

땅속에 묻힌 쵸코의 무덤 냄새를 맡고 근처에 영역표시를 해두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 것은 우리 집 강아지 또리 덕분이다.

사실 또리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이건 동물이건

그렇게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했을까 싶을 정도로 무심히 나의 길만 걸어온 것 같다.

또리를 통하여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라는 메시지를 얻는다.

또리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내 감정대로 대해도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도

짖는다고 마구 혼내도...     


또리를 키우기 전에는 도저히 못 키울 것 같았다.

삶이 바빠서 책임을 다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바쁜데 언제 목욕시키고 산책시키고 놀아주냐는 거였다. 

생각해보니 그 바쁜 일이란,

사람 만나 밥 먹고 차 마시면서 공감하는 척  잡담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람한테 줄 시간은 있지만 개한테 줄 시간은 없다는 의미였다. 

딱히 사랑하고 사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또리랑 지내면서 밖에 나가 돈 쓸 일이 줄어들었다.

덕분에 사람들한테 받는 복잡한 감정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사랑의 눈빛을 보내는 또리의 눈을 바라보면 하루가 이상할 정도로 단순하고 평안하다.     

짤막했던 나의 사랑의 키가 매일 자라는 느낌이다.

개 덕분이다.


지인들에게 강아지를 키워보라고 하면 예전의 나처럼 바쁘단다.

그러면서 강아지한테 애정을 쏟는 나를 이해하기 어렵단다.

그래도 내 주변에 강아지를 키우게 된 사람들이 늘어났다.

내 동생 둘, 아는 동네 아줌마, 남편 직장 동료 등등...

그들이 한 결 같이하는 얘기가 “진작 키울 걸”이다.     


걱정도 앞선다.

반려견 천만 시대인 만큼 유기견 문제도 심각하다.

결국에는...

사랑받은 인간이 자기의 감정과 사정대로 처분하는 모양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적인 문제인 만큼 무슨 대책이 나오기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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