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내 몸을 맡기며 살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벨이 울렸다.
도어 화면을 보니 경찰이었다.
“무슨 일이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
경찰이 엘리베이터로 8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무슨 위반한 일이 있나 생각을 해봤다.
“교통위반? 무슨 범죄에 연루되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게 없었다.
평생 경찰들과는 인연이 별로 없던 터라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현관문을 여니 두 사람의 남녀 정복 경찰관이 서있었다.
아무리 죄지은 게 없어도 경찰이 나를 찾아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〇〇〇 차주 되세요?"
두꺼운 안경을 걸쳐 낀 덩치 좋은 경찰 아저씨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네, 그런데요, 제 차가 왜요?”
“차를 그렇게 대시면 어떻게 해요?”
“네에? 내차는 지하주차장에 있을 텐데요”
“×××× 차량번호 맞으시죠? 홈마트 앞 주차장 입구에 대충 차를 대놓았던데,
난리 났어요. 빨리 차 빼세요.”
“네에??”
순간, 전날 저녁 아들을 터미널에 데려다주고 집 앞 마트에 갔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우유랑 사이다를 사려고 차를 대충 대놓고 물건을 사고는 차는 놔두고 물건만 달랑 들고 집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무슨 큰 죄를 지은 양 서둘러 옷을 입고 마트로 달려 가 얼른 차를 끌고 왔다.
경찰들과 마트 아저씨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건망증이 심해서 자꾸 깜빡깜빡하네요.”
경찰은 건망증이 심하다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딴 사람이 운전한 거 아녜요?”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근자에 자주 깜빡한다.
이 일이 있기 이틀 전인 토요일, 남편과 온천을 가기로 하고 차에 탔는데 목욕바구니 챙기는 걸 잊었다.
밖에 차를 세우고 목욕바구니를 가지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시 들어온 내가 반가웠던지 좋아하는 우리 집 강아지 또리를 쓰다듬고 내려왔다.
남편과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뒤 목욕을 가기 위해 카페를 나와 온천탕 쪽으로 향했다.
“아차! 목욕바구니!"
기껏 목욕바구니를 가지러 집으로 올라갔다가 그냥 나왔던 것이다.
“내가 요즘 왜 이러지?”
사실 차를 두고 오기 직전에도 깜빡한 일이 또 있었다.
또리를 산책시키고 들어오면서 과일 집에서 과일을 샀다.
카드로 계산을 하고 영수증과 카드를 돌려받은 기억은 있는데 카드가 사라졌다.
카드를 핸드폰 케이스에 아무 생각 없이 대충 넣고 다녔던 것이다.
결국 분실신고를 했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할 일을 까먹거나 한 적이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요 며칠 발생한 일을 받아들이기가 거북하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생각해봐야 결론은 “나이가 들어서”라는 합리화밖에 없다.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세월에 맡겨지는 것이지 나에게 세월이 맡겨진 게 아닌 것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어찌 보면 신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이 하도 짐을 많이 지며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워 짐을 덜어주는 게 아닐까?
세월이라는 길 위에 하나씩 던져두고 단순하게 살아가라는 사인이 아닐까?
나이가 들면 세월이 빠르게 간다고들 한다.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에는 짧은 시간에도 일 처리를 빠르게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반해,
나이가 들면서 일처리 능력이 느려져서가 아닐까?
그러다 보니 같은 일이라도 상대적 시간이 부족해지는 느낌이다.
젊어서는 하루에 대여섯 가지 일을 해냈다면,
요즘은 한 가지 일이라도 무사히 마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에 할 일이 두 가지 이상만 되면 벌써 뇌가 바빠지면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뇌보다 몸이 느리기 때문이다.
세월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뇌와 몸의 균형을 맞추며 세월에 내 몸을 맡기며 살기로 했다.